적당한 성장? 그런 것은 없다
1991년 11월 김종철이 『녹색평론』을 창간함으로써 한국에서 본격화된 생태주의는 기존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뿌리에서부터 뒤집어엎는 일종의 인식혁명이었다. 서구 근대의 개발과 성장 체제에 대해 정면에서 부정하는 일종의 반역이었다. 당연히 이른바 한국의 진보 운동에 대한 전면 비판 선언이기도 했다. 백낙청의 적당한 성장론에 대한 김종철의 비판과 이에 대한 백낙청의 답변에 대해서는 백낙청의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이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1998년 백낙청이 이중과제론과 적당한 경제성장을 처음 제시하고 2008년 김종철이 백낙청의 적당한 성장론을 비판한 지도 벌써 십몇 년, 이십몇 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백낙청의 말대로 시운時運이 변했다.
오늘날 기후위기와 기후재난 사태는 지금까지의 모든 이론과 세계관을 전면 재검토하게 만든다. 기후위기 환원론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지금의 기후위기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변화와도 차원이 다른 위기다.
기후위기는 몇 퍼센트라는 적당한 수치의 성장을 유지하지 못해 생긴 문제가 아니라 성장체제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다. 자본주의 산업화의 발전과 성장체제가 세상을 이 지경으로 파괴하고 말았다. 자연을 상품화해 돈으로 계산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과 사회, 나아가 지구 생태계 전체를 절멸시켜 버리는 ‘죽임’의 팬데믹 바이러스임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오직 이윤만을 위한 생산과 소비 체제는 사람과 자연, 사회와 국가 모두를 돈벌이의 도구로만 보는 괴물이다.
자연은 상품이 아니라 기적의 선물이며 인간 삶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우리는 이윤을 위한 죽임의 성장과 생산 체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살림’의 생산 체제로 전환해야 그나마 우리와 우리 후손의 생존을 지켜낼 수 있다. 때문에 진실로 ‘개벽세상의 주인’ 노릇을 위해서라면 적당한 성장론도 전면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다.
두 사람의 발언만 들어보겠다.
“당신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협상만 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대학생 안잘리 아파두라이Anjali Appadurai의 지적이다. 2011년 11월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열린 유엔UN 기후정상회의석상에서 비정부기구를 대표해서 한 말이다. 유엔 기후정상회의는 그녀가 태어난 해인 1992년 브라질의 리우에서 처음 열렸다.
“당신들은 헛된 말로 저의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았습니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멸종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돈과 끝없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대한 것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16살의 그레타 툰베리가 울먹이면서 분노에 차서 한 말이다. 2019년 9월 23일 뉴욕의 유엔 기후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지도자들을 앞에 두고서였다.
그렇다. 이게 진실이다. 유엔의 지속가능한 개발,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말의 실체는 ‘협상의 언어’ ‘연기의 언어’, 쉽게 말해 헛된 말이었다. 이런 언어의 사용 뒤에는 2021년 글래스고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이전에는 당사국총회 합의서나 유엔 기후변화정부간위원회IPCC의 보고서 어디에서도 석탄업계의 로비 때문에 석탄이란 말 자체가 용어로써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사리고 있다. ‘화석연료’라는 우아한 단어가 그 자리에 대신 앉아 있었다.
2022년 5월, 이산화탄소 420.99ppm
리우 정상회의로부터 30년 동안 해마다 기후 활동가들은 정부에 대해 온실가스 배출을 혁명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는 강력한 호소와 경고를 끊이지 않고 해왔다. 시위도 계속했다. 그러나 온실가스 배출은 해마다 늘어났다. 단 한 해의 예외만 빼고 그렇다. 그 한 해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전세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해였다.
세상에 마이너스 성장이라니! 외눈박이 도깨비 같은 성장주의의 이름짓기는 이런 식이다. 녹색성장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탈성장이란 말도 결국은 성장주의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름이다.
1992년 리우정상회의가 열리던 해의 전세계 이산화탄소 평균 농도는 357ppm. 산업화 이전 지구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는 대략 280ppm.
2013년 5월 마침내 하와이 마우나로아 관측소의 이산화탄소 측정값은 마의 400ppm을 넘어섰다.
마우나로아 관측소가 발표한 2022년 5월의 평균 이산화탄소 측정값은 420.99ppm.2021년 5월 평균 419.13ppm, www.esrl.noaa.gov 우리는 지금 세상의 종말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현실의 자연 파괴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우리 안의 마음속 자연이 파괴된다. 숲이 파괴되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의 숲이 파괴된다. 우리 마음의 나무가 밑둥이 잘려 죽는다. 우리 내면의 생명이 먼저 절멸한다. 우리 마음의 탐욕과 분노와 무지가 나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다.
백낙청은 적당한 경제성장이란 “경제성장 문제를 반체제운동 전략 차원으로 바꾸는 ‘경제에 대한 관념의 전환’”이라고 주장한다. 탈성장의 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단계로서 적당한 성장이 필요하다는 백낙청의 주장은 일종의 ‘뗏목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언어라는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고 나서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적당한 성장’은 뗏목이라기보다 그냥 육지의 소형 경차에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성장주의의 종착점, 이웃 민주주의 없는 극단의 불평등 사회
백낙청이 탈성장을 대중의 먹고사는 문제를 도외시한 당위론으로 비판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성장을 멈추거나 성장주의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극심한 혼란과 굶어죽는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적당한 성장을 해야만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영화 「오징어게임」이 보여주고 있는 바 그대로 극단의 불평등 체제 자체다.
한국의 상위 10% 자산은 나머지 하위 90%의 자산보다 많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14년 동안 상위 0.1%의 근로소득 증가율은 155%에 달했지만 하위 60%의 근로소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김낙년, 「한국의 소득불평등, 1963~2010」, 2012
2019년의 경우에도 상위 0.1%에 해당하는 2만4천명의 소득은 하위 628만명이 번 돈보다 많았다.
성장의 과실은 상위 1%의 기득권 세력이 가져갈 뿐이다. 약간의 떡고물이 그 다음 이른바 중산층에 떨어진다. 나머지 한국의 인민 대다수에게 이른바 낙수효과, 성장의 떡고물은 없다. 성장이란 해를 거듭할수록 인민 대다수를 적당히 착취하는 정도를 넘어 더 극심하게 착취하는 흡혈귀일 뿐이다.
백낙청의 적당한 성장론은 이같은 불평등을 가리는 커튼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초점이 흐려질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1950년대 인민의 삶과 비교하면 2022년 현재 한국 인민대중의 삶은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뀌었다. 차상위 계층이라 할지라도 세종대왕조차 꿈도 꾸지 못했던 칠레산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공중화장실에 가면 화장지는 공짜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소비수준만 놓고 보면 기초생활 수급자일지라도 그야말로 역대 어느 제왕보다도 못하지 않다. 지금은 굶어죽을 염려는 없다는 단언이 상식으로 통한다.
그러나 성장 체제가 아닌 과거 자연순환의 농업사회도 인민들이 늘 굶어죽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비상사태에서 굶어죽는 인민들이 발생하는 것은 지금도 매한가지다. 오히려 식량이 남아도는 풍요의 시대인 오늘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2022년 현재 우리 주위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정신질환을 앓던 50대와 20대 두 모녀가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실이 28일 뒤늦게 알려졌다. 20대 딸은 모친의 돌연사 후 오랜 기간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연합뉴스, 「“아직도 굶어죽는 사람이…” 추석 앞두고 전해진 모녀의 비극」, 2020.9.28.
이런 종류의 아사자餓死者에 대한 기사는 이제 기사화되지도 않는다.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고독사는 대부분 고립사이자 아사다. 몸과 마음의 아사다. 특히 청년 고독사의 증가는 가족까지 해체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경고음을 발하고 있는 탄광 속 카나리아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은 혁명과 전환의 ‘개벽’이 필요한 때
한국이 본격 성장하기 이전인 1960년대 이전은 보릿고개로 표현되던 절대빈곤의 시대였다. 가난한 삶이었다. 그러나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가난하면서도 나누어 먹는 것이 불문율의 도덕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적어도 마을에서 고독하게 홀로 방치되어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날 대다수 인민의 삶 또한 가난하다. 그러나 이웃이 없다. ‘이웃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공동체도 없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 근대화의 성장주의가 만들어낸 세상이다.
생태주의는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근본의 방향전환이다. 인민대중을 포함한 생명체와 자연에 대한 착취를 멈추고 극에 달한 불평등 체제를 뒤엎어야만 인민들이 인간답게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선언이다. 인민들에게 세계관, 인생관을 바꾸자고 권유하고 호소하는 강력한 메시지다. 오직 최대이윤이 지상과제인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삶의 질 향상이 최고의 지상과제인 협동과 공유의 생산체제로 체제를 바꾸자는 강력한 행동 촉구의 언어다.
우리는 손전화스마트폰가 주식회사 기업의 ‘노후화’ 전략에 따라 대략 2년이면 고장이 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동차는 내구연한이 점점 짧아져 최근에는 10년 안팎으로 줄었다. 거의 모든 기계는 닦고 조이고 잘 관리해서 사용하면 대략 30여년을 사용할 수 있다. 핵발전소의 연한이 30년인 것도 그래서이다. 손전화의 내구연한도 30여년으로 충분히 연장할 수 있다.
성장주의를 멈추고 자원순환의 경제로 체제 전환을 하자는 호소는 이처럼 자연파괴, 지구자원 낭비의 이윤을 위한 미친 생산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한 성장주의와 소비주의는,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멈출 수 있다. 그리고 자원 순환의 새로운 체제와 세상을 충분히 열어갈 수 있다.
한마디로 기후위기 시대에 적당한 성장이란 그냥 성장일 뿐이다. 적당한 온실가스 배출은 없다. 그냥 온실가스 배출이다. 그냥 자연파괴고 자연착취다.
개벽세상에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이름짓기가 필요하다. 지금은 다른 차원의 새로운 혁명과 전환이 필요한 시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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