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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주연
소속 동아리 산책중
여행 지역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서울시립미술관
여행지 한 줄 추천 책과 그림을 통해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음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하여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꺼려지고,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갈 수 없던 2021년 봄날. 비대면으로 시작된 독서 모임 ‘서초북살롱’은 우리만의 독서 문화라는 씨를 심기 시작했다.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시기였지만 우리의 대화방은 늘 책에 대한 이야기꽃이 피었다. 2022년에는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의 책을 매달 한 권씩 받게 되었고, 1년간 모두가 성실하게 서평을 하며 글을 쓰는 내실도 다졌다. 그해 겨울에는 더욱 활기차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중 산과 책 그 가운데에서 독서 모임을 이어가자는 의미로 ‘산책중’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냈다. 새 이름을 탄생시킨 날 만장일치와 넘치는 칭찬으로 나는 하늘 저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 2023년에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지원 사업에 채택되어 더 활기차게 산에서 책 이야기를 펼쳐내는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모임 때 떠날 책 여행에 대해 계획을 세우던 중, 우리는 한 여름 뜨거운 더위보다 더 뜨 거운 열정으로 미술관 산책을 구상하게 되었다. 전 세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현대미술 작가 ‘에드워드 호퍼’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을 무렵부터 호퍼와의 산책을 꿈꾸기 시작한 우리였다. 호퍼를 만나러 갈 때 한 손에 들고 갈 책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첫 국내 개인전을 어떤 방식으로 맞이할 것인지, 호퍼의 정서와 예술성을 얼마나 많이 담아낼지 기대감은 점점 더 심오해지기까지 했다. 호퍼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산책해 본다면 우리는 또 다른 시점에서 책 이야기를 펼쳐나가게 될 것이다.
책과 함께 할 미술관 산책에 앞서 이연식 작가님의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이라는 책을 한 권씩 가슴에 품게 된 우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나기로 한 7월 12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설레는 산책이 또 있을까. 각자가 책에서 만난 호퍼와 함께 전시회에 들어선 동아리 회원들은 <에드워드 호퍼의 길 위에서> 전시장 2층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파리, 뉴욕, 뉴잉글랜드 일대, 케이프 코드 등 호퍼의 작품 속에서 거닐었던 곳들의 순서였다. 섬세한 정서를 담아낸 수많은 투박한 습작을 보며 그의 자취를 천천히 따라갔다. 서로의 개인 취향을 존중하는 동아리 특성이 미술관 내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작은 2층 입구에서 함께 했지만 도슨트 신청, 오디오 가이드 대여, 자유 관람 등 각자의 방식으로 흩어져 자기만의 호퍼와 산책했다. 이른 오전 시간의 특권인 한가로움 속에서 여유롭게 호퍼와 적막을 즐기다가 1층 출구에서 다시 모이기로 한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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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어진 2시간 동안 미술관 2층에서 3층으로, 다시 1층으로 여행하듯 다니며 270여 점의 그림과 대화를 나누었다. 1900년대를 살았던 작가는 여전히 사랑받고 주목받으며 재조명받고 있다. 호퍼는 냉엄한 어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이연식 작가의 말에도 공감하지만, 한 폭의 그림 속에는 냉정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와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감정이 들어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 책에서 만난 호퍼의 그림과 이야기에 미술관에서 만난 그림의 느낌이 더해지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몰려왔다. 고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도시의 한 조각, 철도를 따라 여행하듯 이어지는 상상, 차가운 색상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빛, 어디서도 만나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 현실 속에 숨겨진 듯한 순수한 세상.
이번 독서와 전시 관람 이전에는 그저 차갑게만 느껴졌던 호퍼에게서 은은하고 따스한 향기를 느끼게 되었다. 책을 통해 본 그를 천천히 다시 알아갔고, 호퍼의 세계는 어둠이 전부일 거라고 단정지었던 내 생각의 닫힌 문을 조금씩 열게 되었다. 책 여행 날에 만난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세계의 여러 영화감독과 작가들이 호퍼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동아리 회원들에게도 이번 산책이 빛처럼 반짝이는 순간이 되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책과 그림으로 호퍼를 만나 산책했으니 식사 자리에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가더라도 산뜻한 정동길을 걸어 정원 레스토랑 ‘어반가든’에 들어섰다. 동아리 회원 중 한 분도 빠짐없이 모인 날이라 더욱 풍성하고 오색 빛이 찬란한 날이었다. 숲처럼 꾸며진 곳의 한가운데에 놓인 기다란 식탁에 모여 앉아 호퍼의 책을 펼쳤다. 숲속의 새들처럼 지저귀며 우리가 사는 세상과 호퍼의 세상의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낯설고 새로운 그림 속 세상에 초대받았던 날이므로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또 다른 세계를 그림처럼 펼쳐낸다. 호퍼의 손에는 연필과 붓이 있었듯, 우리에게는 책과 말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20세기 초 현대인의 일상들을 담아낸 호퍼 그림의 매력이 얼마나 깊었던지, 몇 주가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번 전시를 벌써 세 번째 방문하신 회원도 계셨고, 호퍼의 삶 속에 아내와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들려주신 회원도 계셨다. 시중에 호퍼 관련 책 중 여러 권을 읽은 회원의 책 소개도 인상적이었다. 호퍼를 계속 사랑하는 한 언젠가는 『호퍼 A-Z』, 『나의 뉴욕 수업』 등의 도서를 추가로 읽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 않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책중’ 회원들에게서 피어난 이야기가 더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정동길에 퍼지는 커피 향을 따라 카페로 스며들었다. 커피루소 카페는 에스프레소를 비롯하여 오렌지 플로우, 너티 멜로우까지 예술적인 티타임이 가능한 곳이었다. 붉은 벽돌의 외관과 짙은 고동색의 계단으로 이어지는 내부의 분위기를 호퍼의 시점에서 바라보며 사진으로 남겨보기도 했다. 책과 그림을 통해 우리는 오늘 호퍼가 되어버린 것이다. 책과 그림이 있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이야기는 멈춰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들을 한편의 글 속에 담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하루가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도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남은 아쉬움을 달래려고 남산길로 돌아 돌아 왔다. 모두가 함께 큰 차에 올라타는 경험이 어린 시절의 소풍을 떠올리게 했다. 구불구불 남산을 드라이브하는 즐거움은 해 본 자만이 아는 것이리라.
‘산책중’의 7월 모임에 함께해 준 호퍼는 우리 모두에게 책과 그림을 통한 힐링을 선물해 주었다. 서늘하고 우울한 작가로 평가될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한 그림 여행과 책 여행은 우리 마음에 오래오래 남아 따뜻한 향기를 풍기게 해줄 것이다. 우리에게 이번 책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넘어선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혼자 떠나는 책 여행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고즈넉하고 정적이면서도 신비로울 만큼 화려한 에너지를 뿜어내게 만드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7월 책 여행을 마치고 이렇게 글로 추억을 남기고 있는 지금, 우리 마음에 자라고 있는 것은 곧 있을 작가와의 만남에 대한 설레임, 그리고 다음 달 떠나는 새로운 책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다. 책을 읽고 산책하며 자아를 발견해 가는 ‘산책중’ 회원들은 책 여행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을 깨우쳐 가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산책 중이다.
★2023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독서동아리를 담다」에 선정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