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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병모
소속 동아리 평일엔독모
여행 지역 경기 평택시 진위면 은사리 삼봉기념관
여행지 한 줄 추천 우리 역사에 다시 없는 위대한 정치가를 만나는 여행
‘평일엔독모평택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의 독서 모임’는 평일엔 평택에서 일하고 주말에만 집에 가는 건설기술인들이 만든 모임이다. 이곳에는 나름의 사연 하나 없이 흘러 들어온 사람이 없는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대기업 인사담당자로 일하던 나는 더 큰 꿈을 꾸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그 후 연이은 사업 실패로 가진 돈을 몽땅 잃고 빚까지 얻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스스로를 엘리트라 믿으며 살아온 나에게 40대에 처해진 이 암울한 현실은 매일같이 ‘구차한 삶의 끈을 그만 놓아버릴까’ 생각하게 할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를 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독서였다.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인생에서 모든 불행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서머셋 몸이 말했던가. 나에게도 독서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창구였다. 과거에 내가 범한 실수들을 꼬집는 책의 글귀들은 화살이 되어 날아와 내 가슴에 꽂혔고, 실수를 복기하는 일은 오늘을 살아야 할 의미가 되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뜻하지 않게 다독가가 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책을 읽었고, 퇴근해서도 숙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책을 붙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겉도는 듯 보이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점점 밝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하는 나를 보아서였을까? 함께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 ‘평일엔독모’는 시작되었다. 이렇게 가까워진 우리는 서로 연차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지만 재미있는 농담도 주고받는다.
“나는 전주 이씨 덕천군파 라고! 왕족이지 왕족! 너는 어디 정씨야?”
반상의 신분제도가 철폐된 지 한 세기가 지나도 어르신들은 여전히 가문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신다.
“구한말에 족보 매매가 성행했으니 그거 다 못 믿어요. 저처럼 역적 집안이라면 몰라도! 저는 봉화 정씨로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의 후손이에요. 삼봉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살해당하고, 고종 때 이르러서야 신원 복원이 되셨으니 누가 역적 집안 족보를 샀겠어요? 그러니 저는 양반 집안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그래? 자기가 역적 집안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그려, 하하하!”
“아 참! 이곳 평택에 삼봉을 모신 사당과 기념관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
“오! 나는 그런 데가 있는지도 몰랐구먼! 그러면 우리 이번에는 정도전에 관한 책을 읽고 삼봉기념관에 함께 가보는 게 어때?”
이렇게 우리는 삼봉이 쓴 책이나 삼봉에 관한 책들을 읽고 독서 모임과 기행까지 하게 되었다.
삼봉 정도전은 부패하고 망해가는 고려를 혁명하고 실질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설계한 장본인이다. 그가 쓴 책들은 병법, 의학, 지리, 산술, 천문, 음양학 등 한 사람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 로 다양 했지만,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판본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훗날에 일부가 복구되었다고 한다. 삼봉이 평생에 쓴 글들을 엮은 『삼봉집』,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체제 연구서이자 법전인 『조선 경국전』,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불교의 폐단을 비판한 『불씨잡변』 등이 그것이다. 독서 모임을 통해 『불씨잡변』이 ‘석가 씨의 잡소리’라는 뜻이라는 걸 처음 알았는데, 삼봉의 불교 폐단에 대한 우화적 표현력과 재치가 엿보이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삼봉집』에서는 그가 남긴 시, 유배 중 부인에게 쓴 편지 등을 통해 그의 온화하고 선비다운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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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을 마치고 우리는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있는 ‘삼봉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삼봉이 죽고, 살아남은 그의 막냇동생 정도복은 고향인 경북 영주로 내려가 살았고, 아들 중에는 큰아들 정진만이 살아남아 이곳 평택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봉화 정씨는 내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영주와 이곳 평택에 많지 않은 수의 동족촌을 형성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입구로 들어서자 고택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기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먼저 교육관에서 교육 영상을 시청하고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삼봉기념관’을 둘러보았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영정에 안 주임님이 소리치셨다. “정씨! 삼봉 집안사람 맞네, 닮았네, 닮았어!”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돌아가신 큰아버지나 아버지랑 이미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신기해하던 참이었다. 영정을 지나자 모임에서 나누었던 『삼봉집』의 목판본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는 정조의 명으로 주석을 달고 재편성하여 판각된 것이라고 한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이어진 삼봉의 정신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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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옆에는 삼봉 문학관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가 설계한 한 양도성 외에 수많은 업적과 철학을 담은 목판 탁본 뜨기 체험을 하면서, 그의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초인적 업적에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문헌사’라는 삼봉의 사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헌’은 고종이 내린 삼봉의 시호로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이 많다는 의미로 문헌공文憲公이라 하였다고 한다.
삼봉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부모님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는 사형인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를 하루에 한 장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정독하여 읽으면서 “임금이 치국을 잘 못하면 갈아 치울 수 있고, 하늘도 갈아 치울 수 있지만 백성만은 갈아 치울 수 없다.”라는 민본주의 철학과 혁명 정신을 키워나갔다. 맹자는 자신의 뜻을 펼쳐줄 왕을 찾아 평생을 떠돌았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삼봉은 ‘몽상가’ 맹자와는 달랐다. 이성계를 통해 그의 꿈을 현실화하였으며, “왕은 세습되기 때문에 언제나 어질고 현명할 수 없으므로 재상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통치해야 한다.”라는 현대의 영국이나 일본 같은 입헌 군주제 사상을 무려 14세기 말에 만들어 낸 위대한 ‘혁명가’였다.
사당을 나와 밭둑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삼봉 선생의 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정치가 삼봉 정도전 선생은 비록 시신 없는 가묘이기는 하지만 그곳에 고이 잠들어 계셨다. 잠시 단체 묵념을 하고 내려오는데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펼쳐내셨던 삼봉 선생님의 삶에 비추어 내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게 되었다.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거부하다 9년이나 귀양살이를 하셨던 삼봉 정도전, 그 역시도 나와 같이 살아 숨 쉬는 인간이었으리라, 그에게도 좌절과 원망과 외로움이 왜 없었겠는가? 절치부심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꿈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귀양지 나주에서 만난 농부들을 스승 삼아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이를 청산하는 민본의 혁명 사상가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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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 평택에 내려와 건설 엔지니어로 일하게 된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 3년간 이곳 평택은, 내가 만든 과오와 실패에 대한 징벌로 내려진 힘들고도 고통스러운 귀양지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느낄 수 있다. 힘든 현장 생활 속에서도 짬을 내어 책을 읽고 실수를 복기하며 얻은 교훈과, 독서 모임을 하며 느낀 성장감은 나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실패가 주는 고통은 ‘도약’이라는 더 멋진 선물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번 독서 기행 이후 나에게 평택은, 삼봉 정도전에게 귀양지 나주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더 성숙하고 발전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제2의 고향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을.
★2023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독서동아리를 담다」에 선정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