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행 KTX를 타고 설국을 다녀왔다.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청량리, 상봉을 지나 양평을 거쳐 가는 KTX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풍경. 서울과 수도권의 어수선한 난개발의 풍경이고, KTX도 그리 빨리 달리지 않는다. 양평 다음부터 풍경이 바뀌고, 열차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며 만종, 평창, 진부를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순식간에 강릉이다.
예전에는 열차로 강릉 한 번 가려면 청량리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원주에서 경북 영주로, 거기서 철암, 묵호로 하여 강릉까지 6시간 걸렸다. 말이 6시간이지 심야에 출발하여 새벽에 도착하는 무궁화호 열차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여 떠오르는 태양을 보러 떠나온 젊은 연인이 아니라면, 심각한 불면과 요통에 시달리는 여정이었다. 그랬는데 KTX로 서울역에서 강릉역까지 222.7㎞를 1시간54분 만에 주파한다. 만종부터 강릉까지 평속 250㎞로 달린다.
여기서부터 풍경도 완전히 바뀌게 된다. 상봉에서 양평까지는 수도권의 번잡한 난개발이고, 양평을 지나면서부터 차츰 여행자의 시선을 되찾게 되는데, 만종에서부터는 설국열차가 된다. 순간, 책 한 권이 떠오른다. 철도와 기차를 통하여 근대사회의 거대한 구조적 전환을 분석한 볼프강 쉬벨부쉬의 『철도 여행의 역사』다. 오랜 중세적 삶의 급격한 단절과 충격적인 변화, 그것이 근대라고 할 때, 쉬벨부쉬는 이를 철도와 기차를 통해 분석했고, 이런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격렬한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다소 일그러진 형태지만, 이 책은 대학 논술고사의 실전 또는 모의고사에 지속적으로 출제되어 왔다. 다음과 같은 지문은 논술공부 많이 했던 젊은 독자라면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것이다.
“하이네는 전통적인 공간-시간 의식이 이렇게 혼란을 겪게 된 순간을 포착해 냈다. 1843년 파리에서 루앙과 오를레앙으로 가는 노선이 개통되었을 때 그는 ‘무시무시한 전율, 결과를 예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 혹은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그러한 무시무시한 느낌’을 언급하였다(중략).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기본적으로 이런 관점은 타당하다. 현실적으로는 글쎄, 급변하는 상황을 투시하는 하나의 원칙적 시선으로는 중요한데 당면의 상황들 즉 단순히 지리적으로 서울과 멀리 떨어졌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자연 관광 요소 외에는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심으로부터 동떨어진 오늘날 한국의 여러 지역 현실을 감안할 때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일상의 여러 부문이 서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같은 맥락에서 강릉역도 생각해보자. KTX 10여년의 역사 동안 여러 지역에 기차역이 신축되거나 증측되었다. 그러나 그 지역의 역사적 특징이나 문화적 정체성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동대구역, 익산역, 오송역, 광주송정역, 목포역 등 어느 곳이나 차디차다. 휑하다. 물리적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크기만 특징적이다.
쉬벨부쉬는 앞의 책에서 19세기 유럽 주요 도시에 들어선 기차역에 대해 “철도와 유리 건축, 이 둘은 산업혁명기에 배가된 생산력의 직접적인 표현이다(중략). 유리 건축의 공간 용량과 전통적인 건축방식 간의 관계는 철도의 교통 용량과 산업화 이전 시대의 교통 간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썼는데, 지금 우리의 KTX 역들에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강릉역은 강철과 유리라는 고전적 소재이지만 매일 아침 떠오르는 동해의 태양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늦은 오후부터 이 원형의 기차역에 테마 조명이 흐른다. 강원도의 역사에서 가장 신선한 충격이 될 강릉행 KTX의 개통이 강원도의 미래에 어떤 효과를 빚을지 궁금하다.
근대 이후 열차는 기존 세계의 물리적 구조만이 아니라 심리적 구조까지 뒤바꾸는 충격적인 문명 수단이 되었다. 기존의 마차에 타는 것과는 다른, 기차 탑승에 따른 신분체계의 교란이 일어났다. 이를 분석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그 역시 기차를 자주 이용하였는데, 그런 날이 있을 때마다 기차 안에서 낭패를 보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심리상담이나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기차 안에서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 꿈을 꿨다고 말한다. 화장실이 지저분하거나 안에 사람에 있거나 심지어는 화장실 자체가 없기도 한 꿈들 말이다.
프로이트는 19세기 말까지 뚜렷하게 존재했던 신분체계가 흔들리고 나아가 서서히 붕괴되는 것에 대한 유럽 중상계급의 위기와 불안감이 마차보다는 더 현저하게 여러 계급이 뒤엉켜 타게 되는 기차, 그 기차 안에서 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꿈으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국비 유학생으로 영국 런던에 가게 된 일본 근대문학의 거두 나쓰메 소세끼 역시 기차에 대한 불안을 적고 있다. 소세끼는 “가끔 교통기관을 이용해보고도 싶었지만,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몰라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고, 단순한 여행 산문이 아니라 영국 근대의 내면을 꿰뚫어본 놀라운 산문 ‘런던탑’1905년의 앞머리에서 적고 있다.
그는 런던에서 기차도 마차도 타지 않았다. ‘런던탑’에서 소세끼는 “런던은 거미줄과 같은 교통망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기차나 마차, 그리고 전차와 궤도열차는 나에게 아무런 편의도 제공해주지 않았다”고 적었다. 편의는커녕 그는 ‘대영제국’의 심장인 런던, 그곳의 거미줄 같은 선로들을 보며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소세끼는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었고, 집에 들어와서는 기차가 내 집과 충돌하지나 않을는지 근심에 휩싸였다”고 썼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신출내기라면 모를까, 30대 중반에 구마모토대학의 전신인 제5고교 교수 신분인 소세끼는 왜 기차와 선로에 충격과 불안을 느꼈을까. 그의 개인적인 심리상태일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라타니 고진은 뭐라고 했던가. 소세끼의 문학세계와 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하면서 고진은 “소세키가 거부한 것은 서구의 자기 정체성아이덴티티”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것은 일본 근대의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다. 그들의 문화주의와 군국주의, 그들의 서양화와 그것의 부정, 그들의 놀라운 계몽적 선취와 날카로운 질주. 고진을 통하여 소세키를, 소세키를 통하여 일본 근대를, 다시 말하여 30대 중반의 뛰어난 인재, 일본 메이지 정부의 장학생이 왜 런던의 교통망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는지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고진이 소세키를 비롯한 일본 근대문학가들의 정신세계를 분석한 명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국내판에는 ‘한국어 서문’이 실려 있다. 그 중 다음과 같은 고진의 의견은 ‘한·일 간 위안부 합의에 대하여 1㎜도 움직일 수 없다’는 아베 정부의 심리적 기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문학을 통하여 일본의 내면을 읽는 데 있어 고진의 이 책은 여전히 고전이다.
“일본의 식민지주의는 주관적으로는 피통치자를 ‘잠재적 일본인’으로 간주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이른바 ‘신세계’ 개념에 기반을 둔 이념이었다. 그것이 후에 팔굉일우八紘一宇·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연결되고 있다(중략).”
★ 이 글은 2018년 1월 16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