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만하면 이 세상도 살 만큼 안정되었다고 여기는 작자들이나 문학예술을 우아한 생활세계의 데코레이션으로 삼아 이른바 ‘교양문화’의 품격을 운운하는 자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작은 소망이 있다면, 서평을 쓰되 테리 이글턴처럼 써보는 것이다. 세 가지 점에서 이 소망은 이뤄지기 어려운데, 그 첫째는 내가 이글턴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글턴만큼 읽거나 보거나 실천하여 왔는가 하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입을 열기 어렵다. 이 점이 결정적이고 이제 언급하게 될 요소는 부차적이다.
그래도 말을 꺼냈으니 몇 마디 해보면, 그 둘째는 우리의 서평문화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날카로운 유머와 애정을 쉽사리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중하게 논평하고 따스하게 감상하는 문화가 반세기 이상 대세라서 날카롭게 찌르되 뼈와 살을 완전히 도려내는 것은 결코 삼가는 서평은 우리 문화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현상이다. 아, 물론 장정일 같은 분들의 서평은 독보적이다.
마지막으로는 서평이 독보적인 연구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정한 동향과 풍향을 점검하는 지평으로까지 올라 있지 못한 상황도 있다. 신간 안내 정도가 아니라 서평, 즉 주목할 만한 새 책을 일단 연구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이전 상태에서라도 풍부하게 점검하고 날카롭게 찔러보고 부드럽게 쓰다듬어보는 서평문화가 아쉽게도 충분히 무르익지는 않았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읽어볼 만한 ‘서평’이 아니라 조금 길게 쓴 ‘신간 안내’ 정도가 난무한 형편이고, 그에 슬쩍 편승한 셈이기도 한 나로서는 이글턴이 되기 쉽지 않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중이다.
이제 이글턴의 책, 책에 관한 책을 읽어보자. 『반대자의 초상』 말이다. 거의 해마다 주목할 만한 연구서를 출간하는 이글턴의 국내 번역본들 중에서 이 책은 이채롭다. 일단 서평집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와 문화론, 현대의 비극론, 무신론과 테러리즘 등 그의 본격 저작에 비하여 이 책은 이름 그대로 서평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짤막한 글들의 연속이라 읽기 쉽고, 서구 지식의 풍향계를 더듬어 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여러 분야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사상가나 이론가들에 대하여 쓰디쓴 블랙 유머로 논평하는 이글턴의 시선과 수사에 의하여, 한여름을 견디기 좋다.
서평을 쓰되 테리 이글턴처럼 써보기 |
우선 몇 문장을 인용해 본다. 이글턴은 20세기 문화사상계에 독보적인 ‘자기 영역’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거장을 논평할 때 흡사 인파이터 권투선수처럼 이빨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의 책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어린 시절에 쓴 소설은 조숙하기는 하지만 단편적이고 벌린의 사상적 레주메가 명료하기는 하지만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라서, 결과적으로 몇몇 빈약한 단편들이 책 행세를 하는 모양새다.”
한편 영미문학계에서 이른바 고전 양서를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으로 유명한 해럴드 블룸의 책에 대해서는 이렇게 논박한다. “블룸은 10대 팬들이 스타를 바라보는 끈적끈적한 감상으로 셰익스피어를 우상화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자신의 언어는 지미 스워가트미국의 텔레비전 전도사의 언어처럼 닳아서 올이 다 드러난 싸구려다. 이 책은 위대한 문학을 읽어야 할 이유는 숱하게 대고 있지만 해럴드 블룸을 읽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대지 못한다.”
반면, 일반적으로 상업적인 기획으로 대중적인 취향을 노린 상품성 있는 책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그런 책의 헐거움을 짚으면서도, 그런 책이 사회적으로 소비되는 현상을 정확하게 해부한다. 세계적인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자서전에 대해 서평하면서 이글턴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데이비드 베컴이 과연 이 책을 직접 썼을지 궁금하다고? 차라리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직접 지었을지를 궁금해 하시라.” 이렇게 시작은 했지만, 전문 대필 작가에 의해 꼼꼼하게 구성된 베컴, 축구 스타이자 세계적인 셀러브리티인 베컴의 ‘문화적 아이콘화’ 현상을 살피는 데 있어서 이 대필 자서전이 쓸 만한 것임을 이글턴은 놓치지 않는다. 이 책에 관한 서평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테리 이글턴 |
“책의 절반은 남자 축구팬을 위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베컴에게 환상을 품는 여성을 위한 것이다. 그 틈새가 부각되는 순간은 베컴이 입을 여는 순간인데, 그때 그 매끄러운, 포스트모던한 육체는 갑자기 어눌한 노동계급 소년으로 바뀐다. 이 대조를 해결하려는 낡아 빠진 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페르소나는 그 사이의 설명할 길 없는 간격을 안고, 그저 기이하게 꼭 붙어 누워 있을 뿐이다. 베컴이 상징하는 문화의 그토록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상의 소개만 읽고, 이글턴이 이죽거리기 좋아하고 잘난 체하는 흔해 빠진 지식인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 잠시 우회하겠다. 그의 자전 대담집 『비평가의 임무』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권위에 도전하고 우상을 파괴할 때는 신랄하기 그지없지만, 아주 형편없는 녀석들이 아닌 한 그런 권위와 우상의 인물이라고 해서 인격 자체를 몰살하는 논평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이 읽어도 쓴웃음 정도는 지을 수 있는 유머를 구사할 뿐이다.
반면 자신이 존경하고 자기와 엇비슷한 길을 걸은 사람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하는데,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삶에 대한 논평이 그러하다. 이 논평은 이 책에서 수록된 것은 아니고,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에 대해 2003년에 쓴 서평인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지주형 교수의 번역을 볼 수 있다. 그 논평에서 이글턴은 홉스봄에 대해 “그는 강력한 영향력, 학식,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역사가이고, 볼로냐에서 베이징까지 환대를 받는 사람이면서도 개인적 친교의 미묘한 기술에도 능한 남자이며,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유혈이 낭자한 한 세기를 살아남은 정치인이지만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파티, 논쟁, 여행, 사상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에너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고 기억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문학예술에 관한 이글턴의 아포리즘을 읽는 맛이 있다. 본격 연구서에서는 쉽사리 알아채기 힘든 그의 문학사상의 정수 말이다. 다음의 문장은 문학 혹은 문학 이론이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 정확한 좌표를 일러준다.
“문학 이론은 실패를 사랑한다. 문학 이론은 완전하고 자기동일적이고 말끔하게 완비된 것이면 무엇이든 역겨워하며 부족함, 시대착오, 막장, 자기파괴에 매혹된다. 문학 이론의 주의를 끄는 것은 실패나 자기모순을 다룬 문학작품들이다(중략). 문학 이론은 패배자의 미학으로, 서사시의 구조나 소설가의 의도에 대혼란을 가져오는 보잘것없는 세부사항을 옹호한다.”
‘실패를 사랑’하는 문학 이론가 테리 이글턴. 그가 이만하면 이 세상도 살 만큼 안정되었다고 여기는 작자들이나 문학예술을 우아한 생활세계의 데코레이션으로 삼아 이른바 ‘교양문화’의 품격을 운운하는 자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서문을 읽어보자.
“혹시 여러분이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자라면, 우리 같은 급진주의자가 여러분을 비판하는 것 자체를 가지고 뭐라 하면 안 된다. 그게 우리 본업인 걸 어쩌랴. 그러니 정적들께서는 우리보다 머릿수가 훨씬 많으니까, 굳이 우리까지 박수를 보내지 않더라도 여러분들끼리 서로 박수를 쳐주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라.”
★ 이 글은 2018년 8월 6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