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D H 로런스의 또 다른 걸작 중에 『아들과 연인』이 있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의 육체와 성을 세부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묘사를 통하여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어떤 욕망삶의 욕망이든 성적 욕망이든 그밖의 무엇이든까지 끄집어냈다는 점에서 나는 『아들과 연인』을 좀 더 애착한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그랬듯이 이 소설도 집필과 출판 과정에서 시련을 겪었다. 로런스는 1910년 가을에 『폴 모렐』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한두 번 정도 쓰기를 중단하다가 1912년 6월에 마무리하여 하이네만 출판사에 보냈는데 출판을 거절당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외설적이라는 것. 7월에 다른 출판사에 출간 의사를 표시한다. 단 로런스의 문우인 에드워드 가넷이 대폭 개정을 한다는 조건.
민음사판 번역본 맨 앞에 실린 바론 부부의 ‘서문’에 따르면 로런스는 “100쪽이나 잘라 내더라도 개의치 않겠어! 어쨌든 이 책은 팔려야 하고 난 살아야 돼”라고 쓸 정도로 그는 궁핍했다. 책은 출간되어야 하고 그래야 먹고 살 수 있었다. 일단 로런스가 먼저 수정작업을 하고 제목마저 『아들과 연인』으로 개칭한 후 이를 가넷이 수정곧 삭제작업을 하여 1913년 5월에 출간되었다.
이 생략된 초판본으로 오랫동안 출간되다가 1992년에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에서 삭제되었던 80여 군데를 되살려 최종본으로 출간하게 된다. 국내의 번역판들은 대체로 이 최종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중에는 초판과 달리 복원된 부분에 표시를 해둬서 로런스의 애초 묘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뒀는데, 그 점에 주목하여 보면 단순히 ‘선정적인 묘사’ 때문에 삭제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지극히 내적인 고백이나 거의 암시처럼 드러낸 비밀스런 취향을 덜어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로런스는 1885년 영국 중부 노팅험의 이스트우드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탄광촌이었고 아버지는 광부였다. 열심히 공부를 하여 노팅험 사범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 또한 노팅험 일대의 어두컴컴한 갱도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 탄광지역에서의 성장과정이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 짙게 배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나는 폴, 아니 소년 로런스의 예민한 감각을 발견한다. 지극히 가난한 탄광지역, 그곳의 가난한 부부, 그리고 두 소년. 형 윌리엄과 동생 폴. 부부는 자주 말다툼을 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한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귀가하는 날 집안은 온통 고함과 비명으로 가득차게 된다. 아버지의 “으르렁거리는 역겨운 고함 소리”와 더불어 때마침 탄광지역에 몰아치는 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커다란 물푸레나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귀청 따갑게 울리는 울부짖는 소리”가 아이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형 윌리엄은 이 세상의 모든 집안 풍경이 그렇듯이 장남답게 때때로 아버지에게 대든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어머니와 동생들을 지키려 한다. 동생 폴, 그러니까 소년 로런스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래 문장에서 밑줄 친 대목이 바로 소년 로런스의 시선이며 바로 이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장차 소설가가 되는 것이다.
“모렐아버지은 춤추듯이 비틀거리며 조금 가까이 다가오더니 몸을 웅크리고 주먹을 뒤로 해서 때릴 자세를 취했다. 윌리엄은 이미 두 주먹을 쥐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파란 두 눈에는 거의 웃음과 같은 한 줄기 빛이 번득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한마디만 더 했더라면 두 남자는 싸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폴은 그들이 싸웠으면 하고 바랐다. 세 아이들은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소년 로런스는 장차 소설가가 되어 기울어져 가는 ‘대영제국’의 관습과 제도, 그 허위의 윤리의식을 묘파해낸다. 그 대표작이 바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다. 이 작품이 처음 출판된 것은 1928년 6월, 이탈리아. 영국과 미국의 출판업자들이 인쇄를 거부하자 로런스 자신이 직접 제작하여 피렌체에서 출판하였다. 『아들과 연인』을 발표하던 무렵과는 달리 어느 정도 살림도 나아졌고 명성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영국과 미국의 세관을 통과할 때마다 외설물 단속에 걸려 압수되곤 하였다. 런던 경시청은 로런스의 그림까지 탄압하였다.
로런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호색문학은 성을 모욕하고 먹칠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용서할 수 없다. 이는 생명이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모독이다.” 다시 말해 로런스는 자신의 작품이 바로 ‘생명이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존중’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소설의 한 대목을 보자.
“성은 모든 접촉 중에서 가장 밀접한 유일한 접촉이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접촉이지요. 우리들은 반쯤 의식하고 반만 살아있는 셈입니다. 우리들은 생기를 띠고 또렷이 이해해야 해요. 특히 영국인들은 서로 조금은 섬세하고 부드럽게 접촉해야만 하지요. 이것이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답니다.”
로런스는 현대를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상태’the living death라고 말했다. 이 상태에서 회생하려면 진정한 성과 사랑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그래야만 비참한 기계문명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영국 상류사회를 혐오하였고 언제나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또 이성 중심주의와 과학물신을 거부하였으며 귀족계급의 속물주의에 대해서도 어떤 자리에서든 거침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로런스는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와 미국 등지로 새 길을 찾아다녔다. 그는 서유럽 백인의 관점이 아닌, ‘타자’the other의 관점에서 그 속으로 들어가 유럽의 문명을 다시 보기로 했다. 세계 각지의 문화 유적지를 답사하고 온 대륙의 고대 신화를 섭렵했다. 남방불교의 성지인 실론의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인류의 ‘오래된 미래’로 파악한 미국 뉴멕시코주의 아메리칸인디언 마을에서 로런스는 서구문명을 ‘바깥’에서 ‘타자’의 시선으로 보고자 한 것이다.
물론 도시 기계문명을 혐오하면서 옛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 회복으로 기울어져 간 그의 행로는 역사의 장구한 흐름으로 볼 때 안타깝지만 ‘실패한 혁명’이 된다. 그러나 한 명의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사랑, 즉 자기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연민과 깊이 있는 사랑이 『채털리 부인의 연인』 곳곳에 묻어 있다. 펭귄클래식코리아 번역본의 맨 앞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의 「서문」이 실려 있다. 레싱은 “이 소설은 깊은 성실성을 노래한다. 이 성실성은 대중의 도덕이나 ‘결심’이나 종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뜻하게 않게 또는 전혀 배신하지 않는, 배신이 불가능한 섹스를 하면서 하나가 되는 데서 나온다”고 썼다.
그동안 이 작품의 성애 묘사에 관심을 둔 독자라면, 잠시 그것을 잊고 레싱의 관점에서, 그리고 로런스가 지독히고 비참한 노팅험 일대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애착하였는지에 주목하여 읽어보자. 소설을 펼치자마자 다음과 같은 첫 문장이 이 소설을 압도하는 주제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변동이 일어난 후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으며, 조그만 거주지를 새로 세우고, 새롭고 작은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 이 글은 2018년 3월 6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