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자동차 블랙박스에 담긴 영상을 보여주면서 안전운전을 당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놀란 것은 일단 텔레비전으로 전송되는 자동차사고의 끔찍한 장면들이었지만 더 전율스러운 것은 내 마음속이었다. 내 마음속에 무슨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 화면을 보면서 좀 더 강한 충격과 좀 더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원하고 있었다. 다행히 급정거를 해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화면을 볼 때, 나는 겉으로 안도하면서 속으로는 뭔가 중요한 장면을 놓치기라도 한 듯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녕 충격이었다. 나는, 그리고 저 프로그램은, 저 프로그램의 제작자와 진행자들은 진실로 도로교통 안전을 위하여 서로 만들고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그런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뭔가 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물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이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재난과 전쟁으로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로힝야 난민 사태가 지옥도처럼 전개되었을 때 외신은 거친 바다를 헤쳐 간신히 낯선 땅에 도착하는 난민의 안타까운 상황을 보도하였는데, 물론 그 핵심 매체는 사진이었다. 사진은 너무도 ‘잘 찍은’ 것이어서, 예컨대 분쟁지역을 여러 차례 취재했던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씨는 처절한 상황을 ‘잘 찍은’ 사진의 모순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못 찍을 수도 없는 일.
이에 대하여 최근 발간된 『무정한 빛』의 저자 수지 린필드는 ‘서문’에서 일곱 개의 심각한 질문을 제시한다. 우선 그 서문의 질문을 살펴보자.
“폭력과 고통이 담긴 사진을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사진을 보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행위는 희생자를 존중하는 행위일까? 왜 이런 사진은 관음증을 자극하는 착취적이고 선정적인 사진이라고 비난 받는가? 이런 사진 속의 사람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진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왜 일부 사상가들은 이미지 없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되리라고 믿는가?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 불가능함을 너무 잘 알고 있을 때 타인의 고통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진이 정치적 트라우마와 정치적 사건의 증인을 다루는 방식은 지난 80년 동안 전쟁의 방식과 목적에서 일어난 급진적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이 일곱 개의 질문은 그 하나하나가 관련학과 대학원의 기말 리포트 정도는 되는, 아니 어떤 질문은, 예컨대 “사진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왜 일부 사상가들은 이미지 없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되리라고 믿는가?” 같은 질문은 최소한 석사학위 주제로 삼아도 될 만큼 중요하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수지 린필드는 다시 서문을 인용하건대 “나는 사진이야말로 고통의 경험에 가장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다른 어떤 예술이나 저널리즘보다 말이다. 그러나 사진은 우리를 고통의 경험으로 데려가는 한편으로, 평범한 삶과 정치적 트라우마를 겪은 평범하지 않은 삶을 가르는 엄연한 간극을 비추기도 한다. 문명은 진보하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폴란드에 설치된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나 크메르루주가 만든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은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고 쓴다.
그러니까 린필드는 재난과 폭력의 현장을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다루는 과정들사진과 미디어와 수용자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면서도, 그러나 바로 그 현장에서 사진이 하는, 아니 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가치와 그것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린필드는 사진의 현대성을 거의 최초로 밝힌 발터 벤야민을 시작으로 하여 사진이 비참한 현실을 은폐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는 크라카우어나 브레히트의 비판,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롤랑 바르트, 존 버거, 수전 손택으로 연결되는 사진의 사회적·미적·윤리적 세계를 파헤친 담론들을 점검한다.
그렇게 시작한 이 책의 핵심은 종군 사진가의 기점으로 꼽히는 로버트 카파를 시작으로 하여 제임스 낙트웨이로 이어지는 참상의 기록에 대한 분석이다.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그 전에 혹은 동시에 다큐멘터리 「전쟁 사진작가」를 꼭 함께 보기를 권한다. 린필드가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는 전쟁과 재난과 참사 현장의 사진가인 제임스 낙트웨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상물이다. 1948년에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다트머스대학을 다녔다. 외항선원이나 트럭운전사로 일하면서 사진을 독학으로 익혔고 1981년 아일랜드 분쟁을 시작으로 니카라과, 코소보, 수단, 팔레스타인을 찍었다. 그 지독한 상태를 잠시 벗어나 뉴욕에서 잠깐 머무는 동안 9·11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참사를 또한 찍기도 하였다.
낙트웨이는 먼 거리의 피사체를 기계적으로 ‘잡아당겨서’ 찍을 수 있는 망원렌즈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렌즈는 대략 10m 이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찍는 데 최적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자신이 긴박한 사태로부터 안전하게 멀리 떨어져서, 빌딩 옥상이나 전봇대 뒤에 숨어서 찍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아예 기술적으로 그 안전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의 바로 눈앞에서 끔찍한 살해가 벌어진다. 그의 바로 눈앞에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돌팔매를 던진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의 앞에서 폭탄이 터지고 그의 머리 옆으로 총알이 스쳐지나간다. 다큐의 끝에서 낙트웨이는 담담하게 토로한다.
“만약 전쟁이 인간성을 부정하려 한다면 사진은 그 반대의 것을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잘만 사용된다면 사진은 전쟁이라는 독에 대응하는 강력한 해독제로 작용한다.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사진가가 거기에 간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던 일을 멈추고 지금 벌어지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독백에는 내적인 고뇌가 탄흔처럼 묻어 있다.
“가장 힘든 것은 타인의 불행을 이용한다고 느낄 때이다. 이 생각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만약 나의 사적인 야망이 순수한 연민을 압도해버린다면 나는 내 영혼을 팔아버릴지도 모른다.”
낙트웨이는 사기꾼도 아니고 남의 고통을 팔아먹는 흡혈귀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논쟁의 당사자가 된다. 린필드가 ‘서문’에서 말한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 불가능함을 너무 잘 알고 있을 때 타인의 고통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같은 해답 모를 질문의 당사자인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언제나 유효하다. 지금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는 순간 국내 몇몇 언론이 평창올림픽 때문에 방남한 북한 여성 예술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고 있다. 심지어 휴게소 화장실 안에까지 가서 찍어 보도하고 있다. 아, 우리는 린필드의 사색과 낙트웨이의 고뇌를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 아닌가.
★ 이 글은 2018년 2월 20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