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베를린의 날들은 짧았다. 길어야 3박 4일, 이번에는 1박 2일. 마르크스가 말했다던가. “베를린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이 격렬한 도시를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하긴 실제 역사가 그러했다. 프로이센의 군주 프리드리히 2세를 시작으로 독일제국의 비스마르크, 제3제국의 히틀러, 오늘날의 메르켈 총리까지 어쨌거나 베를린 운더덴린덴 거리를 장악하고자 하였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 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 역사의 운전대를 쥘 수 있었다.
여러 번 보았던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보고, 아차 하고 놓쳤던 것을 잠시라도 멈춰서서 보고, 그밖의 이유로 생략했던 장소들에 10분이라도 더 머물러 있고자 하였다. 그랬더니, 19세기 건축가 프리드리히 싱켈이 베를린 동부지역에서 조성한 고전 그리스 재현의 건물들이 조금은 더 도드라져 보였고, 21세기의 건축가 리베스킨트의 날카로운 채찍으로 수십 차례 얻어맞은 듯한 유태인 추모 박물관의 섬찟한 형상의 의미도 조금은 어루만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대의 관광문화를 분석한 사회학자 딘 매켈런의 말처럼, 어차피 관광객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보러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이 도시에 관하여, 비록 한 세기 전의 기억이지만, 자신의 유년기에 점점이 박혀 있는 기억들을 섬세하게 되새기려 한 발터 벤야민의 글들을 대신 읽어볼 수밖에 없다. 벤야민의 짧은 기록들은 20년 동안 독일의 권위 있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발행인과 문화면 책임 편집자로 일한 요하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이나 『슈페어 평전』이 말해주지 않는, 이 도시의 미세한 흔적들을 보여준다. 물론 분단 이전의 독일이고 히틀러 이전의 베를린이며 정확히 말하여 벤야민의 유년시절 즉 책의 제목 그대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기록 말이다. 어린 벤야민은 어느 날 부모님과 함께 베를린의 유대교회당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그날 따라 어린아이에게 먼 친척 한 분을 찾아가서 모셔오라고 했다. 소년은 친척어른 집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고 만다. 친척어른에 대한 불만, 유대 종교의식에 대한 불신, 길을 잃어버렸다는 속수무책의 상황, 그렇게 베를린의 거리에서 잠시 방황하게 된 소년을 훗날의 벤야민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렇게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갑자기 내게는 ‘너무 늦어서 교회당에 제때 도착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뜨거운 물결처럼 밀려왔다. 그 물결이 밀려가기도 전에, 아니 바로 같은 순간에 두 번째 물결이 밀려왔다. 그것은 ‘될 대로 되라지. 내게는 아무 상관없다’는 전적으로 불성실한 생각이었다. 이러한 마음속의 두 물결은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갖게 된 강한 쾌감으로 귀착되었다. 그 거리의 뚜쟁이 같은 면이 축제를 모독한다는 생각과 합쳐지면서 일어난 쾌감이었다.”
이 문장에 관한 국내판 번역서의 소제목은 ‘성에 눈뜨다’이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소년 벤야민은 불신과 불만과 대책없이 스스로를 방기해버리는 순간에 ‘성적 쾌감’을 느낀 것이다.
벤야민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원로학자 반성완 세대 이후의 학자들 그러니까 최성만, 윤미애, 심혜련, 김동훈, 노명우 등이 벤야민을 현대도시와 연관하여 숙고해 의미 있는 번역과 깊이 있는 논문을 발표해 오고 있다. 이는 그의 학문적 본령이 기본적으로 근대적 도시 해부를 통한 근대성의 해부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급격한 변화의 연속성과 격렬한 갈등의 지속성’을 겪고 있는 바로 이 한반도 대도시의 모더니티이기 때문이다.
노명우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모더니티」에서 “벤야민은 파리를 통해서 19세기를 규명하려 한다. 따라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인상학적 분석에 국한되지 않고, 파리를 통해 등장하는 19세기라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모더니티 형성에 관한 연구서이다”라고 썼다. 아닌 게 아니라 벤야민은 도시를, 그 자신이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점점 더 변방인으로 추락하며 활동했던 베를린뿐만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던 베네치아와 모스크바, 그리고 무엇보다 제국 프랑스의 도시 파리를 모더니티의 ‘역사적 장소’로 접근했다. 그는 『역사철학테제』에서 “프랑스혁명은 고대의 로마를, 마치 유행이 지나간 의상을 기억에 떠올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하고 회상시켰다”고 썼다.
그런 장대한 작업의 개인적 소묘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다. 최성만에 따르면 이 책은 원래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모티브로 하여 베를린에 관한 유년기의 경험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꽤 긴 글 『베를린 연대기』로 서술되었다가 망명 중에 단편의 조각들로 해체하였다. 어떤 관점에서는 『베를린 연대기』가 청년기의 벤야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사회·철학 사상들이 혼거하며 투쟁하는 20세기 초엽의 베를린, 그 도시의 카페 프린체스. 커피와 술과 노래만이 아니라 벤야민의 기록처럼 고급 매춘부도 있었던 그 카페에서, 벤야민은 저녁마다 재즈 악단의 연주를 들으면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썼다. 훗날 그 카페는 내부 수리를 다시 했고, 이름도 프린체스에서 슈텐뷔크로 바뀌었다. 벤야민은 발걸음을 끊었다. 얼마 후 그 카페는 벤야민에 의하면 맥주 레스토랑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그는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기억하고자 했고, 그것을 자신의 유년시절에 아로새겨진 한 줌의 경험이나 흐릿한 사물로 의미화하고자 했다. 그는 ‘땅을 파헤치는 사람’처럼 썼다. 어떻게? “기억은 이야기하듯이 진행해서는 안 되고, 사건을 보도하듯이 진행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기억은 서사적이고 광상곡과도 같은 리듬으로 언제나 새로운 장소에서 삽질을 시도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로 돌아오면, 이 책은 벤야민이 망명지에서 미리 썼던 『베를린 연대기』를 잘게 쪼개고, 어떤 얘기는 없애고 다른 얘기를 덧입히고, 문장도 몇 번을 더 어루만져가며 ‘언제나 새로운 장소에서 삽질을 시도’한 것이다. 이로써 베를린의 전승기념탑, 티어가르텐, 블루메스호프 12번지, 회전목마, 거지와 창녀, 그리고 심지어 찬장이나 장롱까지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니 고작 하루이틀 베를린의 운터덴린덴 거리를 뛰어다닌 나로서는 이 대도시의 역사의 결을 거슬러 보기 위하여 벤야민의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덧붙여 말하건대, 누구라도 대도시의 유년시절 경험이 있을진대, 벤야민이 이 책의 서문에 쓴 다음의 문장을 깊이 참고한다면 설령 벤야민처럼 쓰지는 못할 지라도 그의 사유의 방식대로 독자들 모두의 유년시절이, 군산이나 인제나 마산이나 서산에서 살아냈던 일들이, 막연한 추억 회상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기억되어 의미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동경의 감정을 통찰을 통해서 억제하려고 애썼다. 즉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함으로써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 이 글은 2017년 9월 5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