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을 보고 난 뒤, 영화의 원작인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동명의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1992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영화 「가여운 것들」 때문에 최근 들어 역주행하고 있다.
그리스신화에서 아테나 여신은 제우스 신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이 소설에서 벨라 백스터는 근대의 신/의료과학자/시체강탈자인 고드윈 백스터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SF 로맨스로 채색된 영화는 벨라의 피카레스크적 성적 편력에 집중하고 있다면, 고딕 환상으로 직조된 소설은 벨라라는 여성 종種의 기괴한 기원과 성장연대기를 추적하고 있다. 부연하자면 소설은 벨라의 ‘사랑의 경제’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욕망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젠더의 정치와 언어의 유희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다.
다양한 해석을 독려할 작정으로 『가여운 것들』은 여러 겹의 소설적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이 소설의 서론은 마이클 도널리라는 역사학자가 폐기처분하려던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낸 회고록이 소설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이클은 이 소설의 ‘실제’ 작가이자 편집자이기도 한 앨러스데어 그레이에게 회고록 뭉치를 넘겨준다. 이 소설의 본론이자 소설 속 소설인 맥캔들리스의 긴 회고록이 끝나는 지점에 의학박사 빅토리아의 짧은 편지가 결론처럼 첨부되어 있다. 벨라/빅토리아가 후손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인즉 맥캔들리스의 회고록이 터무니없는 고딕 환상이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실제 작가인 앨러스데어의 비평적 역사적 주석까지 실어놓음으로써, 이 회고록의 진실은 진지한 농담처럼 다가온다.
이 두 가지 입장의 충돌이 반전을 위한 그다지 새롭지 않은 소설적 장치라고 우기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많다. 벨라의 주장대로라면 헌신적이었던 남편 맥캔들리스가 왜 회고록이라는 이름하에 고딕 ‘리벤지 포르노’와 같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기록했을까? 여러 인물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한다면 누구의 이야기가 더욱 진정성이 있는가? 고드윈 벡스터, 맥캔들리스, 던컨, 블레싱턴, 애터슬리와 벨라와의 ‘사랑의 경제’가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해 서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런 궁금증들이 여전히 남는다.
우선 ‘나,’ 맥캔들리스의 회고록에 의하면 벨라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의료과학자인 고드윈 백스터가 제작한 작품이다. 고드윈은 1881년 스코틀랜드의 대도시 글래스고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25세의 젊은 여성의 시신을 검시소에서 빼돌린 다음, 임신 중이었던 태아의 뇌를 그녀에게 이식한다. 고드윈의 저택에서 벨라를 본 가난한 시골뜨기 의사인 ‘나’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한다. ‘나’는 성숙한 여성의 몸에 한 살짜리의 뇌를 가진 벨라의 순진무구한 호기심에 끝없이 매혹된다. 태아의 뇌를 이식했지만 그녀의 지식 습득 속도는 딥러닝하는 AI급이다. 벨라는 처음엔 철자법이나 문법도 몰랐지만 ‘대영제국’이 자랑하는 영문학의 언어를 번개처럼 습득한다.
재밌게도 그녀가 구사하는 언어들은 실존 작가, 시인, 예술가들의 시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테니슨의 시구를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키플링의 시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의 시어가 아닌 경우도 있다. 온갖 작품들의 표절, 인용, 번역, 각색의 틈새에 작가는 이런 퍼즐들을 던져놓고 독자들을 시험하면서 신-메이커로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문학적 언어의 은유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차용한 벨라의 탈맥락적인 시어들은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낯설기 때문에 전복적인 유머로 작동하기도 한다.
‘나’는 고드윈과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벨라와 약혼한다. 하지만 백스터의 유언장 작성을 위해 방문한 변호사 던컨 웨더번과 그녀는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난다. 던컨과 세계를 떠도는 두 번째 여행에서 벨라는 최대한의 성적 지식을 학습한다. 여행 도중에 보내온 벨라의 편지에 따르면 다양한 인물들로부터 다양한 성지식을 습득하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약혼한 ‘캔들’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벨라에게 맥‘캔들’리스는 캔들촛불로서 그녀의 행로에 불을 밝히는 인물처럼 보인다. 벨라 자신이 계몽된 발광체가 되고 있는 마당에도 그녀가 고작 촛불인 맥캔들리스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어쨌거나 온갖 성적 모험에도 불구하고 벨라가 그에게만은 일편단심이었다는 것이 맥캔들리스의 믿음이었다.
벨라와 함께 도망친 바람둥이 던컨으로부터 벨라의 삶을 폭로하는 편지가 고드윈 백스터에게 당도한다. 던컨의 편지대로라면 남녀 사이에서 사냥꾼/사냥감, 포식자/피식자, 유혹자/유혹당한 자라는 상투적 이분법은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다. 편지에 의하면 성적 수치심을 주입받지 못한 벨라의 성욕은 무한대이며 통제 불가능하다. 벨라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던컨은 도박에 매달린다. 던컨이 빈털터리가 되자 벨라는 파리의 사창가에서 온갖 성구매자 남성들에게 매춘을 하면서 여비를 번다. 그녀는 자신이 기생충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돈도 벌고 성적 욕구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고드윈 백스터가 벨라를 그토록 밀어낸 이유는 유전으로 물려받은 불치의 매독 증상 때문이었다. 매독에 걸린 남성 신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기어코 의사가 되려는 벨라에게서 신성모독적인 유머가 느껴진다. 남성들에게는 자연스런 욕구의 배설을 허용했다면, 여성에게는 정숙을 강제했던 위선적인 성윤리, 여성의 피임에 대한 원색적 비난, 낙태의 범죄화, 여성 성욕의 히스테리화 혹은 질병화 등 19세기적인 성 풍속도를 보면서 벨라는 백스터가 결코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 알아가게 된다. 오데사에서 지브롤터로 향하는 크루즈 선상에서 만난 냉소주의자 애스틀리의 ‘쓰라린 지혜’로 인해 지상의 가여운 존재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알게 되면서 공감능력이 없었던 벨라는 마침내 눈물 흘리며 타자에 대한 연민을 배우게 된다. 여기까지는 맥캔들리스의 회고록을 대충 참조한 내용이었다.
반면 벨라의 편지는 맥캔들리스의 회고록 속 그녀와 자신은 전혀 다른 존재임을 입증하려고 한다. 벨라는 자신의 생애사를 간략히 기술한 다음, 소설적 장치로서 개연성을 신봉하는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은 이제 두 가지 이야기 가운데에서 선택할 수 있으며, 어느 것이 더 개연성이 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412쪽)고 단언한다. 맥캔들리스의 회고록은 진실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병적인 환상문학들의 짜깁기여서 소설적 개연성마저 없다는 것이었다. 그중 몇 개만 추려본다면 그의 회고록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드라큘라』,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 등등에서 제멋대로 표절, 인용, 각색,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었다.
미래의 후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자신은 환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임을 강조한다. 자신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의 여성 판본이 아니라 19세기 영국스코틀랜드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혁명가였다. 악랄하게 부를 축적하여 산업자본가가 된 그녀의 아버지는 신분세탁을 위해 그녀에게 숙녀수업을 강제했다. 그녀는 수녀들로부터 부르주아 남성의 놀잇감이 되는 수업을 9년 동안 받았다. 그런 다음 아버지가 정략적으로 연결시켜준 블레싱턴 경과 결혼했다. 블레싱턴 장군은 열여섯 살의 어린 하녀를 데리고 놀다가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버린다. 그러면서도 아내인 빅토리아의 성적 욕망에는 음핵절제술로 대응하고자 했다. 그런 시술을 요청받고 방문한 의사가 고드윈 백스터였다. 그의 도움으로 그녀는 블레싱턴에게서 탈출하여 완전히 다른 신분으로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벨라는 무수한 남성들 중에서 그 누구도 아닌 고드윈 백스터만을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를 갓god이라고 부르면서 벨라는 그의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고드윈은 자신은 개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개라고 말한다. 고드윈Godwin은 이름처럼 근대의 신/과학자이지만 신god을 뒤집으면 개dog가 된다. 갓은 벨라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녀가 공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헌신적인 남편감으로 맥캔들리스를 권한다. 빅토리아가 스코틀랜드 최초의 ‘여’의사가 되기까지, 의사였던 두 남자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다. 맥캔들리스는 경력단절남이 되면서까지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성별 분업을 역전시키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자녀교육, 돌봄노동, 가사노동, 성노동은 남편인 맥캔들리스가 담당하고 그녀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일했다. 빅토리아는 지상의 모든 가여운 것들을 위해 페미니스트, 낙태 옹호주의 의사,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로서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변혁에 일평생 헌신했다. 반면 공적인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던 맥캔들리스는 책상머리에 앉아 끊임없이 끄적거리는 작업을 해왔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이 회고록이 되었다는 것이 빅토리아의 편지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맥캔들리스는 벨라를 왜 이런 식으로 기술했을까? 벨라의 말처럼, 고드윈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한 복수심에서? 그렇다고 당대의 억압적인 성문화를 초월하여 자유롭고 자율적인 행위 주체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벨라의 말 또한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은 독자들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 보라는 식으로 이 소설은 구멍과 틈새를 남겨두고 있다.
어떤 서사를 믿든 선택은 독자의 몫이겠지만, 어쨌거나 여성의 욕망은 보호자, 부양자에게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하는 데 있다는 것이 벨라의 항변이다. 이 소설은 한편으로 19세기의 보수적인 성풍속도를 남성들의 눈을 통해 전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당대의 젠더, 섹슈얼리티 관행을 벨라의 목소리를 통해 혁신적으로 뒤집어놓는다. 이런 맥락에서 벨라는 19세기에 혁명적인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m 페미니스트로 다가온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