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극심한 공포감으로 다가오던 무렵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2021을 접했다. 표제를 보면서 든 생각은 ‘지구는 끝을 향해 내달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실이 있다고?’였다. 시기가 시기니만큼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표출된 SF 작품일 것으로 짐작한 것.
소설 전편을 읽고 난 후 내 짐작이 반만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SF와 디스토피아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내면은 매우 따뜻하다는 것, 무미건조하게 과학을 다루는 듯하지만 내밀하게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 ‘지구 끝’과 ‘온실’이 대비되듯 그렇게.
『지구 끝의 온실』은 비교적 가까운 미래인 21세기 중반2055년~2059년과 그로부터 60년 뒤인 22세기 초반 시간대를 머금고 있다. 이천 년대 중반에 지구생태계가 절멸하려다 겨우 살아나 60년이 지난 시점이라는 설정이다. 공간적 스펙트럼도 매우 넓어서 미국 샌디에이고 솔라리타 연구소, 말레이시아 프림 빌리지 숲, 아프리카 랑가노의 숲, 한국의 해월과 온유 등으로 지구촌 전반을 무대 삼는다.
이야기 구조를 살펴보자. 프롤로그와 2장은 더스트에 의한 지구 종말의 시기, 1장과 3장은 지구 재건 후 60년이 지난 시기로 교차 구성하였다. 따라서 각 장의 시기, 장소, 인물들이 모두 다르다. 더스트와 인간 사냥꾼을 피해 은신처를 찾는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 편의 프롤로그를 지나면 느닷없이 60년 후의 더스트 생태연구소 연구원 아영이 등장한다. 덩굴식물 모스바나가 한국 도시 해월 전체를 뒤덮는 사건에서 이어지는 2장은 다시 60년 전 더스트 폴 시기의 말레이시아 프림 빌리지로 피신해 간 여자들의 이야기로 옮겨가며, 시간과 장소는 다시 바뀌어 3장에서는 아영과, 모스바나에 얽힌 프림 빌리지 온실 밖의 정비사 지수, 온실 안의 식물학자 레이첼의 이야기가 담긴 기록칩에 의거한 과거 이야기 등이 서술된다.
이렇게 인물, 공간, 시간대가 다 다른 이야기 전체를 연결해 주는 매개물은 모스바나. 잡초에 더스트 분해기능을 장착한 이 가공식물 덕분에 생태계와 지구의 모든 숨 쉬는 것들은 되살아난다. 그러나 더스트나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악착같이 살아남고, 죽은 것들을 양분 삼아 자라나고, 한번 머물렀던 땅은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한자리에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멀리 뻗어 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106쪽)인 잡초 성분의 모스바나는 더스트폴 시기가 아닌 평상시에는 농작물과 다른 생태계를 완전히 뒤덮어 다른 식물들을 질식시키기도 하고 인체에 해로운 성분을 내뿜기도 한다. 상황과 시기에 따라 구원식물로 환대받기도, 골칫덩어리 잡초로 제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중성이 있다.
모스바나의 매력은 다른 데 있다. 기능성과 상관없이, 밤중에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푸른빛은 한겨울 밤의 오로라처럼 황홀 그 자체다. 쓸 데 없지만 신비로운, 과학이 실수로 만들어 낸 이 아름다운 빛의 마력을 그악스러운 잡초에게 부여했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모스바나를 개발한 레이첼, 전달한 지수, 프림 빌리지 피습 후 모스바나와 함께 흩어진 여자들이 어떻게 지구를 되살려내는지에 관한 후세대 인물 아영의 추적과정이 큰 틀의 외부 서사라면 내부에는 지수와 레이첼, 그리고 식물에 관한 작가의 진지한 탐색이 존재한다. 20퍼센트의 인간 유기체에 두뇌, 장기, 팔 등의 신체를 전선과 나노칩과 기계 등으로 대체한 레이첼은 사이보그인가 인간인가? 정비사 지수와 사이보그 간의 감정의 교류는 사랑일까 단순한 거래일까? 두 여인은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공생의 관계인가, 대체 불가능의 절대적 존재인가? 독가스 가득한 실험실에서 모스바나를 만든 까닭이 죽음으로부터 지구를 구하자는 거창한 사명감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지수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었다면, 지수 역시 레이첼과 헤어지고 난 다음에도 생이 다할 때까지 레이첼의 행방을 추적해 왔다면, 살아 숨 쉬는 내내 서로를 그리워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다면, 사이보그 아닌 인간존재로서의 레이첼, 정비사 아닌 존재로서의 지수로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다면? 이 지점에서 ‘지구 끝의 온실’은 ‘지구 끝의 사랑’으로 읽히기도 한다.
1948년, 조지오웰이 소설 『1984』에서 보여준 감시시스템이 30~40년 후 그대로 재현되고 오늘날 점점 더 강력한 감시시스템 체계로 돌입하였듯 김초엽 작가가 경고하는 기후 혹은 생태계 전반의 절멸이 30~40년 후에 도래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지구 생태계 절멸의 원인은 당연히 인간, 그 가운데 인간의 ‘기술’이라고 작가는 단언한다. 기술이 기후위기를 초래했고 그 기후위기를 해소할 새로운 기술의 실험 부작용이 더스트의 자가증식을 낳았으며 이를 막아내지 못한 채 인간은 돔시티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이 시사하는 것처럼 30~40년 뒤의 테크놀로지는 극단의 혁명상 태에 도래해 있을 것이다. 스마트 돔시티가 왜 없겠으며 우주정복인들 못 하겠는가. 인간형 로봇, 로봇형 인간도, 인공기술로 편집된 식물들도 없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기술혁명 만세라도 불러야 할까?
문제는 그런 기술을 가능하게 할 에너지인데, 과학기술은 우매하게도 더 많고 더 편하고 더 빠른 방법으로 에너지원을 얻는 쪽으로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에너지 생산의 여러 방식들이 가져올 수 있는 무시무시한 후유증을 애써 무시하는 듯하다. 친환경의 탈을 쓴 자본의 욕망은 과학기술 혁명의 욕망을 부추기고 테크놀로지는 단시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얻어내려 한다. 원자든 수소든 태양이든 바람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로봇도 돔시티도 우주선개발도 가능할 터이니. 작가는 경고한다. 생태계 전반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고효율의 에너지원을 얻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이냐 하고. 여기서 작가는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는 생태계 관에 대해 따끔하게 충고한다.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365쪽)
레이첼의 말과도 같이 ‘인간은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일 뿐이다. 우리는 지배할 수 없다. 타자로서의 식물과 동물, 물과 공기가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취약한 존재이다. 이제 주인 노릇으로 잘난 척하는 대신 우리를 먹여 살리는 생태계의 수많은 타자들을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연일 오미크론 확진자가 늘어나고 팬더믹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디스토피아 현실에서 그나마 모스바나의 푸른빛처럼 황홀경에 빠뜨리는, 동물이든 사이보그든 동성이든 유일무이하게 내게 소중한 존재가 있다면, 그러면 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