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소설이구나, 하다가 일격을 당했다. 사실적 서사를 허물어뜨리는 반전에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SF적’ 반전을 사용한다. 하긴, SF와 페미니즘 소설이 그리 다른 것 같지도 않다. 두 장르 ― 페미니즘이 장르일까 의문이 들지만 ― 가 염원하는 것이 늘 가능할 듯 아직 가능하지 않은 조금 뒤의 미래라는 점에서, 그리고 변신하는 몸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작가는 수록작들에서 여성의 몸이 겪는 문제를 다각도로 새롭게 다룬다. 주인공은 자신이 물건인지 동물인지 혹은 존재가 사라지는 중인 어떤 모호한 것인지 혼란 속에 있는데, 주체적인 주인공 스스로 ‘욕망당하는 몸’을 기획해내는 아이디어가 획기적이다. 첫 번째 수록작 「예쁜이수술」의 주인공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처음부터 난, 그 애보다 내가 먼저 그 애를 탐낼 줄 알고 있어요. 보통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15쪽)
“연인에게 극도로 비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한 여자애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남자는 그 일을 여자의 가족에게 알렸고, 여자의 부모는 딸을 요양원에 넣어버렸죠. 그 여자애가 어떤 변태적 쾌락을 추구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그래봤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아요. 간절히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유폐시킬 만큼 황홀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16쪽)
그럼에도 이런 과감한 기획은 난관에 맞닥뜨린다. 기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내면화한 동시에 내면화하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버티는 여성 주체의 이중적 흔들림 때문이다. 주인공은 삼중으로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수록작 「여덟 입」을 보면, 날씬한 몸이 되기 위해 위절제술을 받은 주인공은 자기처럼 그대로 자기 몸으로 살아가라고 화를 내는 레즈비언 딸 ― 딸도 뚱뚱하다 ― 과 반목한다. 이 소설에서 남들이 원하는 날씬한 몸은 내 스스로를 받아들일 때의 뚱뚱한 몸과 내적갈등을 일으킨다. 하지만 뚱뚱한 몸 또한 내 진짜 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모성의 몸으로서 주인공에게 공포를 자아낸다. 위절제술을 하면 타자의 시선에 의한 몸이 되고, 내 자신의 뚱뚱한 몸으로 남아있으려면 부드럽고 풍만하다고 인식되는 모성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 굴레가 씌어진다. 그 속에서 진짜 나의 몸은 무엇인가. 그러니 위절제술을 받은 이 여성은 뚱뚱한 몸의 유령을 늘 마주한다. 위주머니는 작아졌지만 대신 유령을 달고 살게 되었다.
이 소설집에서는 여성의 적은 여성 자신의 생각이자 이에 따른 머뭇거림이다. 주인공 여성 화자들은 자기 욕망에 대해 아주 용감하다. 민감한 사회심리적 센서를 탑재하고 가부장적·이성애적·의료기술중심적 사회, 혹은 타인들이 원하는 것을 너무나 지나치게 ‘안다’. 남들이 원하는 것을 너무 느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그 충돌은 여성의 몸을 뇌에서 떼어낼 정도로 강렬하다.
소설적 형식이 독특하다. 희곡적 장치를 이용하거나 잔혹동화를 의식의 흐름처럼 끼워 넣거나 보고서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나열해놓아서 독자에게 비밀을 일대일로 털어놓는 느낌을 주는데 작가만큼 센서가 발달한 독자들은 같은 고통을 알 때의 쾌락을 경험할 것 같다. 나도 그래, 나도 이런 걸 느껴, 하는 식으로.
레즈비언 정체성 또는 LGBT를 다루는 소설은 이성애자의 사랑을 비교의 배경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있다. 이성애자의 사랑은 합법적 결혼 제도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의심쩍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최근 이성애 로맨스 텍스트들은 로맨스의 자리를 이미 LGBT 소설들에 내주고 있다.
수록작에서 주인공이 되는 몸들은 같은 성을 사랑하거나 양성을 원한다. 그러다보니 한 치의 손해도 허락하지 않는 이득만이 전부인 세계 속에서 소수자의 사랑의 이야기를 밀고 나가자 아이러니하게 성차가 휘발된다. 이 소설 속의 남성과 여성의 몸들은 그저 몸들일 뿐이며, 성역할이라는 프리즘은 이성애의 굴레일 뿐이다.
월요일독서클럽 회원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건 「예쁜이수술」의 주인공 목에 매어진 ‘리본’이었다. 리본에 대한 회원 각자의 의견은 다 달랐다. 소설 속에서 여성들은 색깔은 다르지만 어쨌든 리본을 매고 태어난 것으로 가정된다. (나는 회원들의 리본 색깔은 뭐고 내 건 어떨까 궁금했다.) 여성 화자와 결혼하는 남성은 그녀만의 것인 이 리본을 풀고 싶지만 아내가 풀지 말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안 푼다. 하지만 리본은 결혼을 유지하게 만들며 남편이 끝까지 아내에게 흥분케 하는 자극제다. 리본은 남편 결핍의 기호다. 리본 덕분에 아내인 화자는 가정에 묶여있지만 자기만의 것이 있다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아들도 다 장성시키고 나이가 좀 든 화자인 아내는 더는 남편에게 내줄 게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리본을 풀어도 좋다고 허가한다. 자기 욕망에 충실했고 이 결혼도 자신의 계획이었던 화자는 결말에서 자기만의 것을 포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읽는 순간 오히려 리본이 리본으로 매어져 있었을 때, 결혼이 환상임이 드러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소설은 타인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서의 충돌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런 갈등은 주체가 주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면서 나는 이렇게 남들과 다른 나만의 나야, 라고 하는 만족감을 선사해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살게’ 유지한다. 타인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주체가 그 진실을 맞닥뜨릴 것인가 하는 갈등이 진짜 갈등인 것 같다.
차이를 통해 드러나는 주체를 포기할 때 어떤 황폐하고 무서운 진실의 세계가 열릴까. 이 소설집은 리본을 푼 개별성 없는 몸들의 파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매우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무척 지적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