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힘들고 불편한 진실과 대면하기 싫어서 읽지 않고 한옆으로 밀쳐두었던 책이 있다. 불편한 진실을 ‘안다’고 한들, 사소한 일상의 어느 것 하나 바꿀 의지도 없고, 바꿀 능력도 없다면, 그것을 감히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자체가 뒤에 남은 사람들의 책무라는 의미에서 다시 집어 들게 되었다. 그 책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다. 원전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목소리가 다시 대세가 되는 시대다. 그런 주장들이 이 책을 읽도록 자극했다.
원전이야말로 ‘청정에너지’라고 한다. 우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조선일보는 ‘탄소중립을 요청하는 시대에, 대체에너지로서 풍력 발전과 태양광 발전은 비경제적이다. 바닷가에 세운 풍력발전소는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서 예측한 발전량을 얻을 수 없다. 새만금 방조제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은 새똥으로 뒤덮여서 발전은커녕 새똥 세척하기에도 바쁘다. 그러니 청정에너지인 원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탄소중립이 절실한 시대이므로 원전을 다시 청정에너지원으로 규정하고 폐쇄했던 원자로까지 재가동하고자 한다. 핵전쟁에 사용되는 악마의 핵이 아니라 전기생산을 위한 평화의 핵은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깨끗하며, 가장 안전한 에너지라고 그들은 선전한다. 멀리는 체르노빌, 가까이로는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희생당하고 고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폭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들 한다.
가장 안전하다는 원전의 폭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미국 HBO 제작 드라마 「체르노빌」의 토대가 되었다.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 영토에 있었으므로 벨라루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체르노빌의 원전 폭발은 구소련 연방의 위성국가였던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접경지대였던 벨라루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살았던 모든 존재들을 초토화시켰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원전 폭발 이후 10년에 걸쳐 100명 이상을 인터뷰한 증언집이다. 이 증언집은 그냥 읽어보는 것 이외에는 서평이랍시고 달리 덧붙일 말이 필요치 않다.
이 증언집은 자신들의 이야기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지만 정작 그 다큐멘터리를 볼 수조차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잊혀져버린 자신들의 삶이 너무 외로워서 기억하고, 기록해달라고 알렉시예비치에게 부탁한다. “다들 책을 쓰잖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살고 계시면서 왜 아무것도 안 쓰시나요?”(10쪽) 작가가 양심적 지식인의 역할을 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알렉시예비치가 피폭자들을 인터뷰하고 다닌다는 사실 그 자체가 벨라루스 공산당국에게는 조국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파렴치한’ 매국 행위였다. 게다가 그는 28년 동안 벨라루스를 철권통치하고 있는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저항하는 반체제 시위대의 정신적인 지주이기도 했다. 그러니 벨라루스에서 그의 책이 출판되기는 힘들었다. 후일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마찬가지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고르바초프 정권이 추진하였던 개혁 정책의 기본 노선. 국내적으로는 민주화·자유화를, 외교적으로는 긴장 완화를 기조로 한다. ― 편집자 주 이후에야 비로소 이 증언집은 출판될 수 있었다.
「사람의 외로운 목소리 하나」로 시작해서 「사람의 외로운 목소리 둘」로 마무리되는 이 책에서 처음과 끝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악몽 같은 삶에 관한 이야기다. 첫 이야기에서 스물세 살의 류드밀라는 행복한 신혼이고 임신 중이었다. 류드밀라의 남편은 젊은 소방관이었다. 어느 날 밤1986년 4월 26일 류드밀라는 절대로 안전하다고 선전했던 원전폭발을 목격한다. 남편 바실리는 즉시 현장에 투입된다. 일본제 로봇마저 녹아내리는 방사선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그들은 방호복 하나 배급받지 못했다. 소방대원들은 여느 현장이나 다를 바 없는 차림새로 진화작업에 투입되었다. 목숨 걸고 책임을 다한 결과 바실리는 방사성 물질이자 핵폐기물이 되어버렸다. 류드밀라는 남편과 절대 접촉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어기고 남편과 끝까지 함께 있었던 대가를 치른다. 아이는 사산하고 남편은 죽고 자신은 망가진다. 딸아이의 시신은 국가가 연구하겠다면서 앗아가 버렸다. 남편 바실리의 시신은 방사능 덩어리여서 국가가 콘크리트로 밀폐한 채 매장해버렸다. 핵폐기물 처리에 투입되었던 소방대원, 군인, 경찰, 인부들은 사력을 다했고 공화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 대가는 오염과 죽음이었다.
주민들을 퇴거시켰던 경찰과 군인들, 광부들 중 어느 누구도 초기에는 방사능에 관한 정확한 정보조차 없었다. 어딜 가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면서 이주를 거부하는 노인들에게 당국은 보드카를 주면서 달랬다. 원전 폭발물을 제거하는 군경들에게도 몸에 쌓인 방사능을 씻어내라면서 보드카를 나눠주었다. 그곳에서 보드카 한 병이면 통하지 않는 일이 없었고, 방사능 유출은 그처럼 가벼운 일이었다.
전쟁이라면 으레 적군이 있다. 하지만 방사능과의 전쟁에는 적군이 없다. 그것은 전쟁의 문법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냄새도 없는 전쟁은 백전노장들에게도 속수무책이었다. 공산당 정부는 국가의 치부를 드러내서 서구 자본주의 세계가 공산주의를 비난할 빌미를 주면 안 된다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라고 그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서방의 특수요원들이 공산사회를 몰락시키려고 계획적으로 원전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는 가짜뉴스가 바이러스처럼 입에서 입으로 떠돌았다. 소련당국은 이 엄청난 재난을 쉬쉬하면서 거짓말로 덮고자 했다. 하지만 이 재앙은 소련연방 붕괴의 단초가 되었다. 구소련의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 사태가 소련의 붕괴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1986년에 체르노빌 원전 폭발이 있었고 1989년에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소련이 붕괴되었다.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망자들은 죽어서도 말한다.
체르노빌은 피폭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생명체, 비생명체를 망라하여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다. 인간의 탐욕으로 지상, 지하, 공중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렸다. 당국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모든 것을 통째로 파묻었다. 그들은 땅껍질을 벗겨서 오염된 흙을 시멘트 관에 묻어서 봉쇄했다. 하늘이 끝난 자리에 새들은 어디로 날아갈 수 있겠는가. 지상에 존재하는 개나 고양이, 말과 같은 동물들뿐만 아니라 흙에서 생존하는 존재들도 완전히 절멸되었다. “땅속에서 사는 지렁이, 풍뎅이, 거미, 유충,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다양한 벌레와 생명체를 시멘트 벙커에 묻었다.”(17쪽)
사람들은 자신들만 구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배반했다. 사람들이 떠난 후에 군인이나 사냥꾼이 마을로 들어와 동물들을 사살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목소리가 반가웠던 개와 고양이들이 뛰쳐나왔다. 이 이야기를 듣고 “왜 거기 남은 동물들을 도와주면 안 됐어요?” 한 소년이 눈물을 글썽이며 카메라 감독인 세르게이에게 물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새들과 대화할 수 없었던 세르게이는 “그러게, 왜? 나도 생각 못 해본 거였다. 그래서 대답도 못 했다. 우리가 하는 예술은 사람의 고통과 사랑에 대한 것이지, 모든 생물을 취급하지는 않는다. 사람만! 다른 세계, 동물, 식물에까지 몸을 낮추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지 않은가. 다 죽일 수 있다. 요즘 세상에는 그런 게 더는 판타지가 아니다. 사고 후 처음 몇 달 동안 사람들의 이주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일 때, 동물도 같이 이주시킬 프로젝트가 논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모두를? 땅 위를 걸어 다니는 동물들은 어떻게 시도라도 하겠지만, 땅속에 사는 벌레, 지렁이는? 저 위에, 하늘에 있는 것들은? 참새, 비둘기를 어떻게 대피시키지? 어떻게 하지? 그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175쪽)라고 예술감독인 세르게이는 통탄한다.
체르노빌에서 강제이주한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체르노빌레츠’가 되었다. “체르노빌레츠는 개똥벌레야. 밤에도 야광이래.”라면서 아이들은 이주한 체르노빌 아이들을 따돌렸다. “체르노빌레츠는 죽은 후에도 무덤 위로 빛이 난다.”(404쪽)라는 말처럼 이는 피폭된 사람을 상징한다. 이들 체르노빌레츠들은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히바쿠샤·被爆者·피폭자처럼 자신들도 자신들끼리만 결혼해야만 한다”(164쪽)면서 스스로 자가격리하면서 산다. 처음에 사람들은 재난보상금을 받는 그들을 질시했고, 나중에는 그들을 핵폐기물 덩어리라고 혐오했다. 체르노빌 이후 세상은 체르노빌레츠와 나머지 사람들로 나눠진 것 같았다.
자본의 욕망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2005년 키예프 여행사는 체르노빌 여행상품을 선보였다. “핵 메카를 방문해보라. 상품 가격도 매우 매력적이다.”(408쪽)라고 광고한다. 농담이 아니다. “핵 관광은 특히 서양 여행객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세상살이가 너무 평범하고 지루하기에 사람들은 요즘 보기 드문 새롭고 강력한 체험을 하기 위해 온다. 사는 게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핵폭발도, 화산폭발도 관광상품이 되는 시대다.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이든 월성원전의 가동 중단이든 간에 사람들은 나만 안전하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관망하고자 한다.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한, 나는 죽지 않을 것이고, 핵재앙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지구행성은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하고 싶어 한다.
자본주의적인 소비생활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핵재앙, 기후재난 등은 개인적으로는 해결불가능한 문제다. 지금의 소비생활습관과 행태를 완전히 뒤집어놓을 수 있는 시스템의 변혁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한 말이다. 게다가 우파들은 그런 위기를 몰라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재난이 가져다주는 특혜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위기를 부정하려고 온갖 수사를 개발하고 동원한다고 글로벌 환경운동가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주장한다. 핵폭발, 탄소가스 배출, 기후위기로 인한 비상사태는 우파들이 극혐하는 부의 재분배, 정부 규제, 공유와 배상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비상사태를 결코 비상사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상사태를 비상사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적인 비상사태이다.
이런 시대에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으면, 체르노빌은 과거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다. 이 증언집이 있으므로 그나마 체르노빌을 기억하게 된다. 인간은 그야말로 망각의 동물이다. 기억은 짧고 위기는 반복된다. 그것이 두렵다, 미래를 염려하는 동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