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나에게 여유로운 은퇴의 삶이 주어진다면, 밴을 개조하여 북미 대륙의 국립공원 캠핑사이트를 따라서 여행해보리라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은퇴 이후에 여행하면서 ‘사치스럽게’ 즐기려면 남아도는 시간만큼이나 넉넉한 여윳돈이 필수적이다. 물론 돈 없이도 여유 있게 여행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노마드랜드』엘리 출판사, 2021의 린다 메이처럼, 캠핑사이트 관리를 하면서 국립공원을 떠도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워킹홀리데이이자 돈 없이도 여행할 수 있는 낭만적인 기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시대에, 고령자들에게 죽음보다 더 가혹한 삶이 돈 없이 노후를 버티는 것이다. 나이 들어 집도 없고, 연금도 없고, 배우자도 없고, 일자리도 없다면 누구라도 디즈멀랜드Dismaland, 디즈니랜드를 풍자해 영국 서부 해안에 문을 연 패러디 테마파크의 이름으로 ‘우울한 놀이공원’이라는 뜻이다. ― 편집자 주의 유랑민이 되기 십상이다. 도시의 삶에서 주택 난민은 노매드Nomad가 아니라 노숙자다. 『노마드랜드』는 그런 주택 난민으로서 떠도는 ‘하우스리스’ ― 마음의 집인 홈home이 없는 홈리스가 아니라 집house이 없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부른다. ― 들의 이야기를 담은 비소설이다.
클로이 자오Chloé Zhao, 赵婷 감독은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의 비소설 『노마드랜드』번역본의 제목를 가공하여 극영화 「노매드랜드」2021로 제작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이 보여준 유랑의 삶은 인상적이었다. 한때 그녀는 임시직 교사로서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67세가 된 지금 남편과는 사별하고, 직업도 없고, 젊음도 없고, 집도 없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인 밴에 몸을 싣고 일자리를 찾아 길 위로 나선다. 길 위에서 떠도는 그녀에게 안락하고 안전한 가족의 삶으로 재편입될 기회가 찾아온다. 그럼에도 자신에 대한 자존감으로서 가난할 자유를 택하는 펀의 마지막 모습은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는 펀으로 분한 프랜시스 맥도먼드Frances McDormand에게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영화가 아닌 책 『노마드랜드』로 다시 돌아오면, 작가가 3년 동안 여러 인물을 추적 인터뷰했지만 그중에서도 중심인물은 린다 메이다. 오늘 저녁 그녀는 부엌의 가스 밸브를 틀어놓고 죽으려 한다. 노매드로서 삶을 시작하기 직전인 2010년의 추수감사절이었다. 그 순간 뒤에 남겨질 작은 개 두 마리 코코와 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눈에 밟혀 린다는 다시 살기로 결심한다.
린다는 평생 무수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녀에게는 건축사 수료증과 대학 졸업장도 있었다. 열정 많고, 재능 많고, 인정 많고, 열심히 일했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지는 못했다. 트럭 운전사, 칵테일 웨이트리스, 종합건설업자, 바닥재 상점주인, 보험회사 간부, 건축물 준공검사원, 국세청 전화 상담원, 외상성 뇌손상 치료기관 간병인, 노년층 대상 정부 프로그램의 개 사육사, 견사 청소원 등.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열악한 노동으로 옮겨가는 것이 보인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제외한다면 린다는 평생 등골이 휘도록 일했고,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웠다.
그렇게 일했음에도 예순네 살이 된 지금 연금은커녕, 집도 없고 건강보험도 없다. 지금 그녀는 스퀴즈 인Squeeze Inn이라고 부르는 그랜드 체로키 라레도에서 생활한다. 그녀는 몇백 킬로를 달려서 캘리포니아 샌버니다노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앞으로 3개월 동안 캠프장 관리일을 할 작정이다. 국립공원임에도 공원관리는 주 정부가 아니라 민간기업이 운영한다. 린다와 실비앤은 민간기업인 랜드 매니지먼트 회사에 고용되어 시급 9달러에 주당 40시간을 일한다. 그나마 여름 한 철 몰려드는 캠핑족들을 위한 한시적인 일자리다. 그들의 일자리는 모집 광고가 보여준 것처럼 낭만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내가 버킷리스트로 삼았던 북미 국립공원 캠핑사이트는 누군가의 노동 위에서 청결과 쾌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캠핑객들의 잔불 정리, 자잘한 말다툼 해결, 쓰레기 줍기, 장작 팔기, 캠핑객들의 입소와 퇴소, 캠핑 요금 수납, 캠핑장의 예약 정리, 트레킹에 관한 조언, 그리고 화장실 청소까지 전방위로 일한다.
캠핑사이트 관리 일이 끝나면 린다는 사탕수수밭, 비트밭, 감자밭, 오렌지밭 등을 전전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아마존 캠핑사이트로 출발한다. 아마존 물류창고에는 십만 명의 임시직 노동자들이 일한다. 이곳에 아주 새로운 형태의 기업의존형 임시 캠핑촌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신조어 캠핑촌이 한동안 형성된다.
이들은 시급 11달러 50센터를 받고 일하기 위해 온갖 모멸적인 조사를 받는다. 범죄경력조회, 약물검사, 건강검사 등. 그들은 그런 수모의 과정을 거쳐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기회를 얻는다. 아마존 기업은 이들을 캠퍼포스camperforce라고 부른다. 이들은 주문이 몰려드는 크리스마스 대목 시즌의 막대한 배송 수요를 맞추기 위해 고용된 계절성 노동자들이다. 아마존은 하우스리스인 이들이 3개월 동안 머물 수 있는 캠핑사이트를 임대한다. 휴가 시즌의 수요급증이 끝나면 캠퍼포스 프로그램은 없어지고 임시직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그들이 캠핑촌에서 떠나는 광경을 관리자들은 ‘미등 행렬’taillight parade이라고 그럴듯하게 이름 붙인다.
아마존이 그나마 비능률적인 노령인력80대도 있다.을 고용하는 이유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감이나 시혜적인 입장 때문이 아니다. 노매드들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세월 몸에 밴 노동습관과 노동윤리가 남아있다. 젊은이들처럼 능률적이지도 못하고 굼뜨고 부상도 흔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일에 무책임하지는 않다. 그것만이 공룡기업이 그들을 고용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생활보조금SSI: Supplemental Security Income 수급자들, 푸드스탬프식권 배급표로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을 고용하는 대가로 기업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고용함으로써 엄청난 세제 혜택을 누린다면 기업으로서는 이들을 마다할 리 만무하다.
미국은 다양한 이주민으로 구성된 나라인 만큼 오랜 노매드의 전통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을 몰아냈던 서부 개척민으로, 금광을 찾아서 떠난 광부로, 농작물을 수확하는 일꾼으로 떠돌았다. 과거의 노매드들은 미국의 꿈을 찾아서 유랑했다면 현대판 노매드들은 미국의 꿈이 실패했음을 폭로한다. 현대판 유랑민들 중에는 평생 중산층으로 살 것을 믿었다가 추락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2008년 서브 모기지 버블의 상투를 잡고 부동산 투자를 잘못한 사람들, 주식으로 손실을 본 사람들, 이혼하고 집과 연금을 나눈 사람들, 질병으로 엄청난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프리랜서로 버티다가 더 이상 ‘존버’할 수 없게 된 예술가들, 작가들, 트랜스젠더 등으로, 각자 사연은 다양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사회적 안전망이 없어서 퇴출된 은퇴자들이다.
사실 은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근대 이후에 생긴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가 공산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70세부터 은퇴 노동자들에게 연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은퇴연금, 건강보험을 노동자에게 제공한 것은 노동자를 연민해서라기보다는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유인책이었다. 노동자는 연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일하게 된다. 노동자들에게 연금을 제공하겠다고 했을 때 독일인들의 평균수명은 70세를 넘기지 못했다. 연금을 받기까지 노동자들이 생존할 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처음에는 선심 공작으로 시작했지만 연금이 제도화되면서 사회복지정책으로 기능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마저도 정규직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연금의 출발은 자본주의의 자구책이었던 셈이다.
은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었던 농경사회에서 고령자들은 효도라는 명분 아래 자식들에게 노후를 의존했다. 아니면 수감시설에 더 가까운 구빈원에 들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은 100세 시대다. 50세에 은퇴한다면 살아온 만큼 남은 삶을 스스로 부양해야 한다. 연금 설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할 시대에 오히려 연금은 고갈되고 있다. 돈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에 돈이 없다면, 그런 삶은 죽음보다 더 가혹해질 수도 있다.
그런 우울한 시대에 노매드들은 주류에서 추방된 자신들의 삶을 자유롭고 유쾌한 축제로, 자긍심으로 바꿔내고자 한다. ‘ChealRVLiving.com’ 사이트를 운영하는 밥 웰스는 최소의 소비로 최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탈자본주의적인 생활방식을 전파한다. 자유를 누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주류사회로의 재편입이 아니라 노매드가 되는 것이라고 밥은 설교한다. 세계를 변혁시킬 수 없다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집을 없애고 바퀴 달린 부동산과 더불어 살면서 가진 것은 없어도 나눌 것은 많은 무소유의 삶이 노매드들에게는 진정한 삶이다. 밥은 노매드를 하나의 생활양식이자 사회운동으로 혁신하고자 한다. 노매드들은 더 이상 어중이떠중이, 사회 부적응자, 루저, 낙오자가 아니다. 언젠가 주류사회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지금 자신의 처지가 루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평행세계에서 유랑부족으로 살아남자고 그는 역설한다.
밥은 2011년 하나의 행사를 조직했다. ‘타이어 떠돌이들의 랑데부’RTR: The Rubber Tramp Rendezvous가 그것이다. 애리조나주 쿼츠 사이트 근처 공유지 사막에서 1월에 2주간 개최되는 RTR 축제에는 전국의 떠돌이들이 몰려든다. 멀리서 몰려든 그들은 벤야민의 이야기꾼들처럼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노매드의 요령과 경험을 들려주고 일자리 정보를 공유하고 친구들을 사귄다. 한편으로 떠돌이 생활마저 백인들이라서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RTR 축제에서 만나는 노매드들은 디즈멀랜드에서 ‘유쾌하게’ 존버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2050년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X는 화성에 백만 명을 이주시키겠다고 야심차게 발표했다. 아마존 캠퍼포스들을 쥐어짰던 아마존의 전 CEO 베이조스가 이제 올인하고 있는 블루 오리진은 달나라 여행상품을 이미 출시했다. 한편으로 미국 전역은 유랑의 무리로 들끓는 암울한 디즈멀랜드가 되어가고, 다른 한편으로 슈퍼부자들은 지구행성 탈출을 꿈꾼다. SF의 상상이 현실이 된 지금, 지구행성에서 떠돌고 있는 린다 메이는 스페이스십이 아니라 어스십earthship을 소망한다. 린다가 꿈꾸는 어스십은 쓰레기더미 지구행성을 구할 수 있는 재활용 타이어와 유리병, 페트병, 깡통 등으로 만드는 완벽하게 친환경적인 주택이다. 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 전기는 태양과 바람으로, 먹거리는 텃밭에서 해결하는 구조다. 사용 청구서가 날아오지 않아서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린다는 남미 마약의 유입 통로라 너무 위험해서 가장 값싼 땅 애리조나주 더글러스에서 어스십을 지을 작정이라고 한다. 그녀의 나이 일흔이 목전이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녀가 아니면 ‘누가’ 어스십을 꿈꾸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