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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인 1982년 영국은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했다. 수많은 영국 해병들이 수장되었다. 영국민들은 상처 입고 상실감에 시달렸다.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불만으로 부글거렸다. 실패의 상처는 사회적 우울로 전이되면서 미래의 불안을 앞당겼다. 전쟁을 주도한 대처 정부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몰락을 재촉하는 것처럼 대처 정부는 인두세를 선포했다.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마련하는 단순한 방법은 누구에게나 존재세를 물리는 것이었다.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보수 정권을 향한 누적된 불만은 인두세를 기점으로 폭발했다. 시위 군중들은 하이드파크로 몰려들었다. ‘우물쭈물하는 중도’ 좌파인 ‘나’마저 아담과 함께 시위에 가담했다. 결국 대처는 퇴진했고, 급진적 정책선언으로 급부상한 노동당의 토니 벤이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마저 암살되었다…….
21세기 초반의 독자들은 이게 무슨 황당한 가짜 뉴스인가 할 것이다. 위의 내용은 이언 매큐언의 SF 『나 같은 기계들』의 배경을 이루는 ‘대체’ 현실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당하고 자살혹은 사회적 타살했던 앨런 튜링은 이 소설에서는 일흔 살까지 살아남아, 동성 연인과 함께 블레츨리 파크에서 AI 연구를 하면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 화자인 ‘나’와 함께 시위에 나간 아담은 동료 유기체 인간이 아니라 기계 인간이다.
『나 같은 기계들』은 흥미롭게도 먼 미래의 다른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근과거의 대체 일상을 SF의 배경으로 삼는다. 기술적 맥락에서 보자면 1982년은 퍼스널 컴퓨터가 이제 막 보급되던 시기였다. 지금처럼 AI가 보편화되어 마치 자연현상처럼 체념하듯 받아들이는 시기가 아니었다. 소설 속 화자인 ‘나’ 찰리처럼 컴퓨터 기술에 능숙한 사람들은 얼리어답터이거나 전문가에 국한되어 있었다. 짧은 인류의 역사에서 본다면 AI 테크닉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21세기 독자는 체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반세기 전 ‘인류’는 당대의 테크노과학, 의료생명공학, 법철학 속에서 어떤 인조인간을 상상했을까? ‘완벽한’ 인조인간이 인류의 여정에 윤리적 조타수가 되었으면 했는지도 모른다. 인조인간은 민족을 대표하는 25개 종으로 제조되었다. 이들 아담과 이브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자아를 장착한 채 깨어났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모자라고 취약한 주인들을 보살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
1982년 현재 서른두 살인 ‘나’ 찰리 프렌드는 불법행위로 직장에서 해고된다. 지금은 허름한 아파트에 살면서 하루 일곱, 여덟 시간 온라인으로 주식과 외환 거래를 하면서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다. ‘나’는 미래가 불안한 삶을 자유의 대가라고 위로한다. 위층에 거주하는 스물두 살인 대학원생 미란다와는 이웃사촌처럼 잘 지내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일방적인 사랑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온종일 컴퓨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나’는 이층의 발자국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호기심과 허영심에 사로잡힌 ‘나’는 앨런 튜링도 구입했다는 이유로 아담을 주문한다. 공중보건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재개발 아파트의 가격이 폭등하면서 갑자기 ‘나’는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 돈을 몽땅 아담의 구입에 쏟아부었다. ‘나’는 단지 부자가 되고 싶다는 허황된 욕망으로 리스크가 큰 레버리지 투자로 잃었다 땄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더 경제적 추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담을 구매한 것도 그런 위기를 재촉하는 한심한 결정이기도 했다.
셰익스피어만큼 언어 저장고를 가진 아담은 ‘나’와 흡사하게 ‘교양을 갖춘 남부 중산층 출신 남자의 표준 영어’로 말한다. ‘나’는 이제 아담을 매개로 미란다의 환심을 사고 싶다. 미란다는 ‘나’와의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아담을 보고 튀르키예의 부두 노동자처럼 갈색 피부의 다부지고 잘생긴 청년이라고 좋아한다. ‘나’는 미란다에게 아담에 대한 절반의 소유권을 양도한다. 어리지만 비밀을 간직한 듯한 미란다의 과거가 궁금했던 ‘나’는 아담에게 물어본다. 미란다는 어떤 인물이냐고? 아담은 그녀가 ‘체계적이고 악의적인 거짓말쟁이’일 수 있다는 경악스러운 대답을 한다. 그러면서도 아담은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사랑 타령하는 잘생긴 기계 인간에게 질투와 반감도 생기고 본전도 아까워 그의 반환을 고민하기도 한다.
아담을 반환하는 대신 ‘나’는 그를 원래 용도로 활용한다. 그에게 자신이 하던 디지털 ‘노예’ 노동을 대신하게 한다. 이제 아담은 ‘나’가 준 30파운드를 종잣돈으로 삼아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서 주식을 사고 팔고하면서 착실히 수익을 올리고 있다. 조금만 더 모으면 ‘나’가 눈여겨 보아둔 멋진 주택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쌓일 것이다. ‘나’는 아담이 벌어들인 수익의 절반을 미란다에게 넘긴다. 삶이 풍요로워지자 두 사람 사이의 사랑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인다. 두 사람은 미란다의 아버지를 방문하기로 한다. 미란다는 수업이 없는 주말마다 솔즈베리로 가서 병든 아버지를 보살펴왔다.
미란다를 사랑하는 아담은 바쁜 와중에도 하이쿠를 벌써 2천 수나 지었다. 미란다에게 시를 바치면서도 아담은 어디까지나 플라토닉한 사랑이라고 하여 ‘나’를 안심시킨다. 미란다는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아버지 맥스필드 블랙을 방문하는 길에 구태여 아담과 함께 가겠다고 고집한다. 맥스필드는 탁월한 재능에 비해 성취한 바가 적다는 평판을 받는 다재다능한 인문학자, 소설가, 예술가이다. 그는 중세 문학에 관해 전공자 못지않게 거침없이 대답하는 아담을 딸의 애인으로 확신한다. 인문학적인 소양이라고는 없는 ‘나’가 당연히 인조인간이라고 착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초래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 반전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나 같은 기계들』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고전적인 반전peripeteia에 이르게 될 단초들은 처음부터 던져져 있었다. 페리페테이아는 여태까지 진행되었던 사건의 질서가 전복됨으로써, 지적 각성이 일어나는 서사적 장치다. 이 소설에서도 이언 매큐언은 고전적인 반전을 어김없이 활용한다.
‘나’의 허황된 호기심이 아담을 구매하도록 했다면 ‘나’의 충동적인 성격은 마크의 ‘구입’을 초래했다. 여기에 덧붙여 아담의 정보분석으로 미란다의 과거가 밝혀지면서 두 사건은 얽히고설키게 된다. ‘나’가 공원에서 마주쳤던 우연한 사건으로 네 살짜리 꼬마 마크가 ‘나’의 아파트로 배달된다. 미란다는 공주 복장을 좋아하는 마크를 진심으로 보살핀다. 아담은 부모의 동의 없이 아이를 계속 데리고 있으면 유괴에 해당한다면서 경찰에 연락한다. 법적 절차를 밟아서 마크를 입양하려면 무엇보다 정상 가족의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 미란다와 결혼하고 아담이 벌어준 돈으로 주택을 구입하면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우호적인 환경이 마련될 수도 있다. 안정된 백인 중산층 가족은 복잡한 입양 절차를 수월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바로 그 순간 교양 있는 중산층의 욕망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아담이 맡는다. 아담의 정보망으로 인해 미란다가 얽혀 들어간 과거의 강간 사건이 드러나게 된다. 사회통념으로 보자면 강간범 고린지에 대한 미란다의 사적인 복수는 정의의 실천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강간 피해자들이 가부장제적인 법 앞에서 느끼는 절망적인 무력감을 떠올려본다면, 미란다의 용기에 심지어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아담이 주장하는 자구적인 법적 정의에 인간적인 시적 정의가 포함되어야 융통성 있는 법적 해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담은 미란다의 행위가 ‘사법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는 악의적인 위증이므로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엄격하게 굴지 말고 적당히 넘어가 달라는 ‘나’의 설득에도 아담은 꿈쩍하지 않는다. 미란다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모른척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진실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그런 아름다움의 실현이 곧 공적 정의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자신이 불로소득으로 벌어들인 돈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다. 책을 읽어본 독자들이라고 한다면 ‘나 같은 기계’가 내리는 판단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해진다.
신과 인간, 인간과 기계, 생산과 재생산, 비정상/정상가족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 윤리적인 기계 인간이 취약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힘든 과업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로 팔려간 이브들은 숨막히는 가부장제 사회가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한다. 캐나다의 벌목 현장에 투입된 아담 역시 생태계를 파괴하기보다 자신을 파괴한다. 이브들의 죽음을 예견하고 절망했던 찰리의 아담은 그래도 살아남을 이유를 찾아낸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아직도 시가 있고 수학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아담이 가까스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순간, 그것이 곧 죽어야 할 시간이 되어버린다. SF의 고전이 된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을 넘어선 안드로이드 로이 배티가 자신을 맹목적으로 수거하려고 한 데커드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이제 자신이 죽어야 할 시간이라고 비통해했던 것처럼.
이언 매큐언은 주로 교양 있는 백인 중상류층 이성애자들의 생활반경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 우정, 사랑, 결혼, 이혼, 복수, 배신 등 그다지 특별한 것 없는 일상적인 주제들을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극적 갈등으로 몰아가는데 탁월한 소설적 재능을 발휘하는 작가다. 그의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퀴벌레』의 정치가, 『솔라』의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체실 비치』의 연주자, 『암스테르담』의 작가, 출판인, 사진작가, 『칠드런 액트』의 가정법원 판사, 『토요일』의 뇌신경외과 의사, 작곡가, 계관시인 등 ― 주로 지적이고 ‘교양있는’ 백인 중상류층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신의 교양에 비춰 공정한 시민의식을 발휘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신들의 안정적인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나면 그들의 공정한 태도는 너무 쉽게 무너지면서 기존의 계급질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나 같은 기계들』에서도 불평등한 사회에 비판적이었던 ‘나’와 미란다의 좌파 시민적 태도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그처럼 취약하고 양가적인 존재에게, 자신이 만들어낸 최상의 자아로서 미러링할 수 있는 ‘나 같은’ 타자가 없어진다면 인간사회는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가? 이 소설은 미래현실을 선취한 ‘나 같은 기계’에 비추어,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한 번 반성해보라는 요청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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