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에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시골 학교 풍경이 연출되었다. 전쟁 직후여서 마산지금은 창원시로 통합되어 흔적만 남은 포구 근처에 위치한 월포국민학교는 버려지고 방치되고, 넘쳐나는 아이들의 수용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한 학급 학생 수가 80명이 넘었고 그나마 2부제로 운영되었다. 교실은 콩나물시루였다. 교실도 부족한데 학교도서관은 언감생심이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국민학교 4학년 무렵, 그처럼 가난한 시골학교에 처음으로 도서관이 생겼다. 국어사전을 그때 처음 접했다. 누가 그 무수한 단어들을 이삭 줍듯 주워서 사전을 만들었는지 신기했다.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에 국어사전 찾는 순서가 한두 문제씩 출제되었으므로 선생님께서 사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은 경상도 사투리는 사전에 실리지 않으므로 표준어로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표준어에 관한 정의 또한 알려주셨다. “표준어란 3대째 서울에서 살고 있는 교양 있는 중류층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했다. 마산은 서울이 아닌 시골이었고 나의 부모님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교양도 없는 하층민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사투리가 부끄럽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웠다.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에 배웠던 표준어의 정의가 떠올랐다. 영어를 사전으로 학습한 나에게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세속적인 경전이었다. 영어에 주눅 든 외국인으로서 영어사전에 감히 의구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록에 옥스퍼드 영어사전 연표가 첨부되어 있다. 1879년 제임스 머리를 책임 편집자로 한 사전 편찬 작업은 1884년 첫 권인 『A부터 Ant까지』로 시작하여 1928년 열두 권째인 『V부터 Z까지』1928로 마무리하는 데 자그마치 71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 연표 가운데 특이한 항목이 하나 있다. “1901년 한 독자에게서 온 편지로 단어 ‘여자 노예Bondmaid’가 누락되었음이 밝혀”(557쪽)졌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촉발된 질문은 ‘과연 이 단어만 빠졌을까?’였다. 그렇다면 전설적인 사전의 편찬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그런 궁금증으로 시작된 이 소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의 모든 단어들을 전부 실을 수 없다면, 사전은 어떤 기준으로 어떤 단어들을 채집하고 편집하여 실었을까?
작가가 밝히다시피, 이 소설에서 전개되고 있는 옥스퍼드 사전 편찬 작업은 철저히 고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것이었다. 이 방대한 사전 편찬 작업이라는 뜨개질에서 ‘여자 노예’는 잃어버린 바늘 코 하나에 해당했다. 그 작은 구멍으로부터 시작된 이 소설은 잃어버린 단어들의 역사적 자취를 날줄로 삼고 화자인 ‘나’ 에즈미의 생애사를 씨줄로 삼아 촘촘하게 직조되어 있다. 사전편찬 작업과정에 참여하고 봉사하고 헌신했지만, 잃어버린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잊혀진 존재들이 있었다면? 그녀들의 입장에서 사전 편찬의 역사를 재구성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나’ 에즈미는 갓난쟁이 때 엄마를 여의었고 옥스퍼드 사전 편집자인 아빠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집안에 돌봐줄 사람이 없으므로 ‘나’는 아빠의 직장 상사인 제임스 머리 박사 댁의 어린 하녀인 리지의 보살핌을 받는다. 에즈미가 네 살이었을 때 리지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리지는 주인댁의 여덟 아이들 시중에다 에즈미까지 돌봐준 셈이었다. ‘나’에게 리지는 의지처였지만 아가씨와 몸종처럼 같은 신분은 아니었다.
머리 박사의 묵인 아래 ‘나’는 네 살 때부터 스크립토리엄으로 아빠와 함께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스크립토리엄’이라고 하면 중세 수도원의 웅장한 기록보관소를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그곳은 옥스퍼드 대학 뒤뜰에 자리한 허름한 창고였다. ‘나’에게 그곳은 보물창고이자 흥미로운 놀이터였다. 그날도 ‘나’는 아빠의 사전 작업 분류 테이블 아래 버려진 단어 쪽지들 사이에서 놀고 있었다. 단어쪽지 하나가 나비처럼 나풀나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것이 ‘여자 노예’ 항목이었다. 그 단어 아래쪽에는 그것이 인용된 문장과 출처가 적혀 있었다. ‘나’는 뜻도 모르면서도 그것을 앞치마 주머니에 소중하게 집어넣었다가 리지의 트렁크에 보관해두었다. 장차 이 트렁크에는 수많은 단어쪽지들이 쌓이게 될 터였다.
‘나’는 아빠에게 세상 모든 단어들이 사전에 실리는지 물어보았다. 아빠는 흔히 사용되는 단어일지라도 활자화된 출처가 없으면 사전에 포함될 수 없다고 했다. 무식한 하층민들의 입에서 나오는 비속어나 출처를 찾을 수 없는 입말은 배제된다는 말이었다. 셰익스피어나 디킨슨이 사용한 단어들은 사어가 되어도 사전에 실리지만 생기 넘치는 입말들은 출처를 밝힐 수 없으므로 사전에 등재될 수 없었다. 특정한 집단이 사용하는 ‘고급한’ 단어들이 다른 집단의 저급한 단어들보다 우월하고 그래서 보존가치가 있다고 간주된다면 모든 단어가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하층민 여성들이 저잣거리에서 사용하는 저속한 언어들은 사전에 실리리라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빠한테 ‘여자 노예’의 뜻을 여쭤보았다. 아빠는 “남의 소유가 되어 일하는 어린 여자, 속박된 하인 또는 죽을 때까지 시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도 자라면 리지처럼 시중service을 드는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아빠는 “리지가 시중을 드는 건 운이 좋아서지만, 네가 그런다면 운이 좋지 않아서일 거야.”(29쪽)라고 대답한다. 시중을 받는 사람과 시중을 드는 사람은 나눠져 있으므로, 시중 받아온 사람이 시중을 들게 된다면 신분이 추락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똑같은 단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스크립토리엄에서 성장한 ‘나’는 아빠처럼 편집자가 되어 리지 계급의 언어들을 채집하여 사전에 등재하리라 결심한다.
리지는 대가족의 시중을 드느라 항상 진이 빠져 있다. 이처럼 하인이라면 누구라도 ‘진 빠진knackered’과 같은 구어를 무기력한listless과 같은 문어로는 도무지 대신할 수 없음을 뼛속까지 알고 있다. 리지는 항상 진 빠져 있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백 살이나 먹은 ‘무기력한’은 출처가 분명한 반면 하인들이 온몸으로 체감하는 ‘진 빠지는’은 출처를 특정하지 못하므로 사전에 실릴 수 없다. ‘나’는 리지의 고달픈 삶에서 나오는 생생한 단어들을 사전에 싣고 싶다. ‘나’는 ‘무기력한’에 빗금을 긋고 ‘진 빠지는’으로 수정하고 출처를 리지로 특정한다.
“저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이 큰 집에 사는 모두가 따뜻하게 일어날 수 있게 살펴요. 일어나서 식사할 수 있게 준비하고요. 그리고 모두가 코를 골기 전에는 잘 수가 없죠. 저는 하루의 절반 정도는 진 빠지는 기분으로 보내요. 늙어빠진 말이 돼버린 것 같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출처: 리지 레스터, 1902년.
에즈미는 표준 영어사전에서 계급, 젠더, 지역, 직업 차별 등으로 배제된 단어들을 채집하는데 열중한다. 인생의 고비마다 죽음과 상실에 발목 잡혀 고통과 슬픔과 좌절을 경험하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에즈미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고 우호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엄마 노릇까지 대신해준 학식 있는 아버지의 충실한 보살핌을 누렸다. 진보적인 부르주아, 독신, 지식인, 여성들인 이디트 톰슨애칭 디트과 베스 이모들의 도움도 삶의 고비임신, 출산, 입양, 결혼, 사별 등마다 넘치게 받았다. 친구 같은 하녀 리지의 도움으로 삶의 현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을 채집할 수도 있었다. 그녀 덕분에 시장통 구석에 좌판을 깐 전직 매춘부 메이블의 썩은 이빨 사이로 떨어지는 쌍욕과 저속한 단어들을 이삭 줍듯 주웠다. ‘나’는 여성들이 쉬쉬하면서 사용하는 남세스러운 몸언어들을 대담하게 채집했다. 리지의 트렁크에는 ‘나’가 물어온 단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직업여성으로서 배우, 창녀, 페미니스트가 동류로 취급되었던 시절에, ‘나’는 배우이자 서프레제트였던 틸다 테일러로부터 세속적인 성정치에 눈뜨게 된다. ‘나’는 틸다의 거리 연설로부터 여성공동체sisterhood를 채집한다. 애초에 시스터후드는 수녀들의 자매애를 뜻하는 단어였고 동지란 뜻은 없었다. 에즈미는 여기에 ‘여성공동체’ ‘동지’라는 뜻을 덧붙인다.
여성공동체sisterhood: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며 연대하는 여성들: 동지들. 자매님들, 투쟁에 동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틸다 테일러 1906년.
그 당시 서프레제트는 “깩깩거리는 자매들, 교육 수준이 높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아이가 없고 남편도 없는 여성공동체”라는 아주 경멸적이고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즈미 자신은 서프레제트 운동에 비판적이었음에도 그들의 언어를 경멸에서 구출하여 새로운 여성들의 정치적 언어로 기록한다.
평생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편집자가 되지 못했고 편집자 조수에 머물렀다. 그녀가 채집한 메이블, 리지, 틸다의 단어들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실리지 못했다. 에즈미는 평생에 걸쳐 만들었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그녀의 사전인 『여성들의 단어와 그 의미』에 그들의 언어를 수록했다.
에즈미와 평생에 걸친 우정으로 리지는 ‘본드메이드Bondmaid’는 ‘여자 노예’가 아니라 ‘연결된 여자’라고 해석한다. 리지는 “난 노예가 아니지만 머릿속으로는 나 자신이 여자 노예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아가씨가 항상 말했잖아요. 단어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요. 나는 아가씨랑 어릴 때부터 연결된 여자Bondmaid였고 매일매일이 기뻤어요.”(520쪽)라고 말한다. 여자들의 공동체는 ‘여자 노예’라는 계급적 가치가 실린 단어를 동등하게 연결된 여자들로 결속시킨다. 우리는 에즈미의 잃어버린 『여성들의 단어와 그 의미』와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 1989년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사전』 2판에는 초판에 수록되지 않았던 오천여 단어와 의미가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