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온다치 하면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다. 이 작품은 부커상에다 황금 부커상까지 수상했고, 영화화되어 오스카상을 휩쓸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 중 최근2023에 『기억의 빛Warlight』이 번역되었다. 『기억의 빛』은 벌써 십 년 전에 번역되었던 『고양이 테이블』과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비슷하게 다가온다. 온다치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인 자전적 회고록 형식의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어린 소년 화자의 기억, 꿈, 욕망, 상처 등을 돌이켜보는 성인 화자의 시선이 서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겹쳐졌다를 되풀이하는 과정에 드러나는 편차와 반전으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제3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 점에서도 두 작품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자전적 회고록인 『집안 내력Running in the family』에서 언급했다시피, 온다치 가문은 차 농장을 소유했던 대지주로서 스리랑카에서는 특권층이었던 버거 계급burgher이었다. 실론현재의 스리랑카은 근대 식민지 시기 덴마크, 포르투갈, 영국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다. 유럽 국가 출신의 식민주자들로서 지역 여성과 결혼한 사람들의 후손을 일컫는 버거 계급은 덴마크어로 시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은 중남미의 크레올처럼 생물학적, 문화적 혼종이었다. 그럼에도 온다치 집안 사람들은 자신들을 ‘온전한’ 영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온다치는 『집안 내력』에서 자기 가문의 영국병인 친영주의를 ‘웃프게’ 이야기한 바 있다. 스리랑카의 독립 이후 그들은 주로 영어권 국가인 캐나다, 미국, 영국 등지로 대거 이민을 떠났다. 그는 이혼한 엄마를 따라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주했고 스리랑카계 캐나다인이 되었다.
그런 계급적 배경을 가진 만큼 그의 소년 화자들은 주로 교양있는 특권층 부모와 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어린 화자가 가난하고 고단한 무리들이 벌이는 생존투쟁에 재미삼아 가담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악동 짓은 그가 세상을 배우는 데 필요한 값비싼 수업료에 해당한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성장한 화자는 세상에 좀 더 관대하고 성찰적인 인물이 되어 결국은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다. 성인 화자의 아련한 회상을 통해 유년의 뜰을 반추해 본다면 하늘 아래 일어나지 못 할 일은 없다. 그런 만큼 하늘 아래 용서 못 할 짓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품위있고 유려한 온다치의 문장처럼,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어떤 계층의 누구든 공평하게 인간적 품위가 부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기보다 때때로 평평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두 작품이 갖는 유사성 때문에 잠시 『고양이 테이블』을 상호텍스트적으로 언급해 본다면, 어린 소년 마이클은 열한 살 때 홀로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영국의 런던까지 여객선 오론세이 호를 타고 21일 동안 여행하게 된다. 3주 동안 여객선에서 경험한 사건은 그의 평생을 지배한다. 마이클은 식당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인 ‘고양이 테이블’에 배치된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비슷한 또래인 캐시어스, 라마딘과 어울려 ‘나’는 삼총사처럼 여객선을 휘젓고 다니면서 문제를 만들고 말썽을 피운다. ‘나’는 사랑의 대상인 사촌 에밀리와 선상에서 만나 결정적인 사건에 연루되기도 한다.
1등 선실에서부터 3등 객실, 감방, 지하의 엔진실에 이르기까지 여객선의 수직적 구조 자체는 계급화된 세상의 축소판이다. 1등 객실에는 대농장 지주, 귀족들, 상류층 여성들이 있다. 고양이 테이블에 배치된 3등실 승객들 중에는 식물학자, 교사, 피아니스트, 선박 해체 기술자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다. 여객선 감방에는 죄수가 있고,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 하지만 소년들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 등장하는 탈옥수 매그위치나 되는 것처럼 비밀을 품은 그에게 매료된다. 죄수에게는 비극적인 에스텔라인 딸 아순타가 있다. 지하세계의 엔진룸에는 거대한 여객선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열기와 소음에 시달리면서 노역한다.
『고양이 테이블』은 한정된 시공간에서 경험한 일들이고 서사적 차원에서 보자면 에피소딕하게 전개되는 열한 살 소년의 모험담으로 느껴진다. 이에 비해 『기억의 빛』은 『잉글리시 페이션트』처럼 전쟁이라는 예외적인 재난 상황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됨으로써 석연치 않았던 과거의 사건들이 어떻게 상처입히는 현재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지가 사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기억의 빛』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9월 영국 런던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도 열네 살 소년 화자의 시선과 성인 화자의 회고적 시선이 처음부터 겹쳐져 있다. 기억하고 경험한 ‘나’와 그런 기억의 주체가 본 것을 다시 회상하는 ‘나’ 사이에는 간극과 충돌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기억이 ‘나’를 구성한다면, 모호한 기억에 대해 회상하는 ‘나’ 역시 상상적이고 오인된 자아일 수밖에 없다.
화자인 ‘나’, 너새니얼의 부모님은 3층에 거주하는 정체 모를 남자에게 누나인 레이철과 ‘나’를 맡겨둔 채 싱가포르로 떠난다. 남매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 든다. 남자의 수상쩍고 어눌한 행동거지에 ‘나’와 누나는 그에게 ‘나방’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상류층 부모들이 자녀들 교육을 공식적으로 떠넘기는 방법이 기숙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남매 또한 기숙학교로 보내지지만 견디기 힘들다. 나방의 도움으로 그들은 드디어 집에서 통학하게 된다. 그런데 부모없는 집안 식탁에는 점점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 호기심 많은 소년답게 이방인들의 경이로운 세계에 ‘나’는 매혹되고 깊숙이 끌려 들어가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가 가져갔다고 여겼던 여행용 슈트케이스가 놀랍게도 자기 집 지하실에서 발견된다. 남매는 자기 집에 들랑거리는 수상쩍은 사람들보다 엄마의 정체가 더욱 의심스럽다. 엄마는 남편을 떠나고 자식을 버린 채 홀로 어디로 갔을까? ‘나’ 앞에서 보란 듯이 꾸렸던 여행용 가방은 왜 버려두고 떠났을까? 무슨 연유로 나방에게 우리를 맡겼을까? 엄마는 정말 싱가포르로 떠나기는 했을까? 엄마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서 1장에서 ‘나’의 서사는 범죄 스릴러 장르처럼 진행되기도 한다.
‘나’는 나방이 주선해준 크라이테리언 호텔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된다.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나’는 애그니스를 만나게 된다. 돌이켜보니 그 당시 ‘나’는 애그니스의 본명조차 몰랐다. 공영주택에서 사는 그녀에게 주방 일은 ‘나’처럼 지루한 학교생활을 보상해주는 일탈적인 취미생활이 아니었다.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일해야 했던 그녀에게 그 일은 절박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녀의 오빠는 부동산 소개소의 직원이었다. 그녀와 ‘나’는 매물로 내놓은 빈집의 열쇠를 훔쳐서 아지트로 이용했다. 그 집이 위치한 거리명이 애그니스 스트리트였다. 일찌감치 철이 난 애그니스는 ‘나’의 귀족적인 이름과 ‘나’가 구사하는 고급한 말씨로부터 공영주택에서 사는 자신과는 다른 처지임을 눈치챘다. 상류층 자제이자 소년의 풋사랑이 그렇듯, ‘나’는 내 사랑의 미래 따위에는 무심했다. 돌이켜보면서 성인 화자는 그때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철딱서니였던가를 가슴 먹먹하게 깨닫게 된다.
그 시절 밤이면 ‘나’는 나방이 소개해준 ‘핌리코의 화살’이라 불리는 불가사의한 남자와 함께 런던의 밤거리를 하루 밤에도 몇 번씩 트럭으로 질주하기도 했다. 거짓말이 능사였던 화살은 불법 권투장, 개 경주 도박, 밀수, 사기, 경주견의 혈통 위조 등 불법, 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그런데도 화살은 여자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다. 어린 ‘나’의 눈으로 보자면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하필 사기꾼, 거짓말쟁이, 범죄자, 마초인 화살에게 반할까, 그 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화살이 보여주었던 그 당시의 수상쩍은 밤의 행적은 이후 내가 국가정보원 기록보관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마침내 파악하게 된다. ‘나’는 화살의 애인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본다. 그의 여자들 중에 그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지적이고 독립적인 민족지학자 올리브 로렌스도 있었다. 올리브는 어린 남매에게 밤의 숲속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도 두려움 없이 견디는 법을, 기상학자처럼 별자리, 구름, 바람으로 날씨를 예측하는 법 등을 알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올리브는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그녀가 어디로 증발했는지 애인이었던 화살도 몰랐다.
나방이 끌어들였던 수상쩍은 이방인들은 남매에게 일탈적인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그 시기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는지 아니면 학교가 줄 수 없었던 활기와 호기심과 지식의 장을 제공했는지 아직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상층 부르주아 계급의 습관과 규칙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생활했던 그 신화적 시기에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 사건은 엄마에 대한 배신감으로 특히 누나인 레이철의 삶을 파괴하고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 시절의 경이로운 삶은 느닷없는 사건으로 졸지에 강제종료되었다. 식탁에 모여들었던 낯선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1장에서 에피소딕하고 느슨하게 전개되었던 여러 사건들은 2장에 이르면 전후의 국가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제 스물여덟 살이 된 ‘나’는 엄마의 고향인 서퍽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집을 구입한다. ‘나’는 기록보관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엄마와 엄마 주변의 수상쩍은 사람들의 다중적인 정체를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기록보관소의 기록들이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의적으로 파기되고 소각된 결과, 어떤 목소리들은 공적 역사에서 흔적없이 소멸되어버린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던져진 개인들이 좋은 뜻영웅적인 애국 행위 등으로 행한 일들이 누구에게나 좋은 결과만을 가져올 수는 없다. 이 소설의 원제가 그런 뜻은 아닐까? 『기억의 빛』의 원제목은 『워라이트warlight』다. 워라이트는 전시 상황에서 등화관제가 실시되면 사방은 암흑이 되고 그때 길을 밝혀주는 한 점 희미한 빛을 뜻한다. 저 멀리 희미한 빛을 향해 나가면서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전시 상황에서 국가가 하는 일은 칼 슈미트의 말처럼 적과 동지를 명백히 구별하는 것이다. 친구 아니면 적인 세계에서 선택행위는 이미 언제나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애국이냐 이적이냐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확신은 과대망상이나 다를 바 없다. 흑백논리에서 회색지대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워라이트는 결국 ‘터널 비전’과 다르지 않다. 어두운 터널에서 한 점 빛을 향해 달려가게 되면 주변의 모든 맥락이 묻혀버림으로써 바늘구멍처럼 협소한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지간에 국가가 요구한 한 점 빛을 향해 나가는 것 이외의 길은 망각되거나 그도 아니면 처벌이나 보복의 대상이 될 뿐이다.
어린 시절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돌이켜보면서 그중에서도 ‘나’를 매혹시켰던 수수께끼의 인물인 화살과 애그니스가 그립다. 기록보관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는 화살이 깊은 밤중에 운반했던 것들이 니트로글리세린이었음을 알게 된다. 화살과 애그니스처럼 이름 없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런던의 대다수 사람들은 편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어렵고 힘들게 ‘나’는 화살의 흔적을 찾아가지만 그는 ‘나’를 예전처럼 반기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문란했던 생활을 접고 결혼하여 깔끔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가 방문했던 날 그의 아내 소피와 딸은 집에 없었다. 화살은 ‘나’를 봄으로써 떠오르게 될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적대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냉담한 태도에 쓸쓸해진 ‘나’는 그 집의 복도를 되돌아 나오면서 자수천 벽걸이에 눈길이 멈췄다.
나는 밤새도록
잠 못 들고 누워서
커다란 진주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네.
그 당시 애그니스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절박했던 순간 남자친구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 나이에 애그니스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고단했던 애그니스가 잠들기 전 한 줄기 희망의 빛처럼 중얼거렸던 ‘나’만 아는 구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