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서점에 나가면 일단 도둑읽기부터 시작한다. 시간에 쪼들렸던 시절에는 탐욕스럽게 여러 권의 책들을 한꺼번에 주문하고서 읽지도 않고 쌓아두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 어떤 책은 쌓아두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려서 다시 주문하기도 했다. 시간 부자가 된 지금, 책방에 가면 느긋하게 이 책 저 책 집어 들어 만져보고 펼쳐보고 따져보면서 후다닥 구매하지 않는다. 책이 내게 페티시였던 시절은 지나갔다. ‘침대 밑에 쌓인 먼지 더미’처럼 방치된 책들은 짐스럽고 부담스럽다.
주말이었던 그날도 서점의 독서 좌석에 앉아서 나는 도둑읽기에 한창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와서 맞은편에 앉은 젊은 여성이 속삭이듯 입모양으로 물었다. “뭔 책인데 그렇게 재밌어요?” 아마도 내가 실실 웃으면서 책장을 빨리 넘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스톤 매트리스』예요”라고 나 역시 입모양으로 답하면서 눕혀서 읽고 있던 책을 세워서 보여주었다. 표제작인 「스톤 매트리스」 도둑읽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몹시 피곤했던지 맞은편 여성은 졸고 있었다. 그녀가 붙잡고 있던 책 제목을 슬쩍 훔쳐보았다. 『백 년을 살아보니』였다. 1939년생인 마거릿 애트우드가 백 년을 살아간다면 어떤 이야기들을 좀 더 들려줄 수 있을까? 이야기꾼 애트우드의 단편집을 마저 읽고 싶은 마음에 그날은 도둑읽기로 차마 끝낼 수가 없었다.
다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독자로서 따라 읽기에도 힘에 부칠 만큼 엄청난 분량의 장편들을 주로 써왔다. 2003년부터 10년에 걸쳐 나온 미친 아담 3부작『오릭스와 크레이크』2003, 『홍수의 해』2008, 『미친 아담』2013은 애트우드식 ‘유스토피아’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합성어로 그녀의 신조어의 우주를 생성했다. 그런 방대한 SF 이후에 출판된 『스톤 매트리스』2014는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듯 암담한 상황마저 명랑한 목소리로 접근하는 단편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스톤 매트리스』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중 세 편인 「알핀랜드」 「돌아온 자」 「다크 레이디」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사랑, 야망, 성공, 배신, 분노, 상실, 절망 등과 같이 얽히고설킨 정동의 서사들은 세월이 흘러 다들 나이 먹고 흐릿한 정신으로 돌이켜보면 뒤죽박죽 전혀 딴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작가가 늙어가면서 등장인물들도 자연스레 나이 들어간다. 『스톤 매트리스』에서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절뚝이며 걸어가는 인물들은 작가의 다양한 페르소나처럼 느껴진다. 코로나가 극성이었던 시절 출판되었던 에세이집 『타오르는 질문들』에서 애트우드는 「한없이」라는 시를 마지막에다 배치해놓았다. 무너지려는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고 발길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한없이’ 슬퍼 보이는 시적 화자의 뒷모습에서 「알핀랜드」에서의 콘스턴스, 「먼지 더미 불태우기」에서의 윌마가 어른거렸다. 그들에게 반가운 죽음이 그다지 멀리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지구별에서 재앙이 된 초과밀 인구문제와 고령화 문제를 정치화한다. 이 단편은 근미래 시점의 SF이지만, 고려장을 했던 옛날 옛적 이야기라고 한들, 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계’에 머문 장르라고 한들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윌마는 오늘도 초록색 요정들을 기다린다. 비문증 환자들의 눈앞에 날파리들이 떠다니는 것처럼, 윌마의 눈앞에 온갖 차림새의 요정들이 날아다닌다. 윌마는 황반변성으로 주변시가 되고 거의 시력을 잃은 상태다. 윌마의 환시는 샤를보네 증후군실명한 사람이 두뇌의 시각 경로 손상으로 생생한 시각적 환각을 경험하는 현상―편집자 주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아무리 고급 요양원에서 산다고 한들 혼자 이동조차 힘든 노년의 윌마에게 남자친구 토비아스는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된다. 토비아스 또한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윌마의 눈 역할은 아직까지 할 수 있다.
지금 이들이 노후를 의탁하고 있는 암브로시아 매너는 재산깨나 자랑하던 노인들이 모여 있는 으리으리한 요양원이다. 이곳에도 재앙이 닥쳐오는 소리가 들린다. 요양원 정문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시위대는 통통한 아이 가면을 쓰고 이제는 ‘우리 차례’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친다. 노인들의 시대는 끝났다. 그들의 탐욕이 지구를 파괴했다. 토비아스는 윌마의 눈을 대신하여 이 소동을 읽어준다. 그러자 윌마는 “맞는 말이네요. 우리가 망쳤죠.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360쪽)이라고 답한다. 윌마는 기성세대들이 어쩌다 이처럼 극단적인 불평등과 공모했는지 반추해 본다. 지금 자기 곁에 있는 토비아스는 이혼한 서너 명의 전처들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지불하고도 암브로시아 매너에 특실을 얻을 만큼 엄청난 돈을 젊었던 시절 어디서 어떻게 벌어들였을까? 온갖 정경유착을 통해 쓸어 담은 돈은 아닐지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윌마가 그의 속내를 직접 물어본 적은 없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토비아스는 시위대를 보면서 사회주의자들이란 ‘그저 늘 다른 사람들이 고생해서 얻어 낸 걸 가로채려는 게으른’(360쪽) 놈들이라고 분개한다.
아기 얼굴 가면을 쓴 무리들은 “침대 아래 쌓인 먼지 더미” 같은 늙고 부유한 기생충들이 신속히 생을 마감하지 않고 미래의 자원까지 축내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제 노인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우리 차례’ 운동이 되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흡혈귀 귀족들을 제거하려는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있었다면, 미래의 운동은 젊은 피에 빨대 꽂는 늙은 드라큘라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떠안게 된 경제적, 기후적, 지구생태환경적 위기를 탐욕스런 기득권 노인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런 ‘먼지 더미들’의 근거지에 불길이 솟구친다. 일본 SF 영화 「플랜 75」처럼, 이 단편에서도 노인혐오가 쓰나미처럼 몰려든다.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시대에 특히나 가난한 노년은 혐오의 대상이다. 그런 노년에 속하는 나에게 이 단편은 SF적 상상력이 아니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처럼 다가온다.
「스톤 매트리스」의 첫 문장은 “처음에 버나는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301쪽)로 시작한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은 실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버나는 그렇게 의도치 않은 실수를 연발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버나는 세상의 위태로운 불구덩이 속에서도 방화벽 역할을 해줄 ‘다정하고 온화한’ 돈도 충분히 갖게 되었다. 늙었지만 돈 들인 만큼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우아한 얼굴과 괜찮은 몸매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그녀는 비키니를 입고 자글거리는 몸매를 드러내는 지중해 투어보다 명품으로 감쌀 수 있는 북극 투어에 나선다. 그런 투어에 나서는 노년 남성들이 어떤 유형인지 버나는 여러 번의 경험으로 이미 잘 알고 있다. 또다시 실수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돈 많은 노친네를 적극적으로 마다할 이유가 어딨겠는가.
이번에는 밥, 밥, 밥이란 이름의 남성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중에 밥 고엄도 있었다. 그 밥이 그 밥 고엄일 줄이야. 시골 고등학교에서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밥 고엄은 그 지역사회에서 권력자인 광산주의 아들이자 잘생긴 스포츠 스타였다. 최고의 인기남, 최고의 남편감인 밥이 보잘것없는 버나를 무도회에 초대했다. 모두가 보기에 가난한 싱글맘의 딸이자 공부만 잘하는 촌뜨기 버나는 하룻밤 사이에 호박마차 대신 캐딜락을 타게 된 신데렐라였다. 그런데 버나의 인생은 그날 밤 이후 처참하게 바뀌었다. 그 이후에 전개되는 버나의 삶은 사냥꾼 남성, 사냥감 여성이라는 통속적이고 뻔한 이야기다. 그처럼 진부하고 뻔한 남성들의 수작은 수천 년간 지속되면서 강간문화가 되었다. 밥 고엄처럼 천벌을 받을 놈이 천벌은커녕 그 나이 먹도록 너무나도 잘 먹고 잘살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정의의 여신은 정녕 눈먼 것이 분명했다.
예상치 못한 부빙의 이동 때문에 크루즈 투어의 일정이 갑자기 변경되었다. 변경된 일정에 따라 탑승객들은 그날 지질학계의 경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지구상 최초의 생명체를 보러 가게 되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그리스어로 매트리스를 뜻하는 ‘스트로마’에, 돌을 뜻하는 ‘리토스’의 어원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스트로마톨라이트, 즉 돌침대는 생명체였던 청록색 조류가 19억 년을 지나면서 층층이 쌓여 다져지고 화석화되어 둔덕을 이룬 것이다.
버나는 통속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폄하되어온 범죄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이용하여, 19억 년 동안 다져진 스톤 매트리스를 가부장제의 정수리에 정확히 내리꽂는다. 이것은 사적 복수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사회 정의일까? 애트우드는 강간 문화를 각성시키는 데 그 따위 논쟁은 시간 낭비라는 듯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경쾌하게 해결해 버린다.
「이가 새빨간 지니아가 나오는 꿈」을 읽는 순간 이것은 장편인 『도둑 신부』를 단편으로 만든 자기표절 작품이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가의 말을 참조해보았다. 작가에 의하면 이 단편은 2012년 『왈러스』에 기고했는데 ‘당시 작가들은 각자의 전작에 등장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둑 신부』에 등장하는 마녀 지니아, 그녀의 친구들인 로즈, 캐리스, 토니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했다고 한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장편과 단편 사이에 작가의 연륜이 느껴진다. 장편 『도둑 신부』를 읽었을 때 나에게 지니아는 생생한 인물이라기보다 작위적인 팜므파탈로 여겨졌다. 새빨간 거짓말이 능사인 지니아는 세 친구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는 질 나쁜 여자였다. 그 결과 친구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마음은 지옥이 된다. 하지만 단편에서 세 친구는 가부장제가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강제한 것들을 소유하려고 안달하는 대신 내려놓는다. 그들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신 진정 자신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준 자가 역설적이게도 지니아다. 그들은 한때의 팜므파탈이었던 지니아가 사실 그들 안의 팜므파탈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되면 지니아는 평생 가부장제의 수인으로 살았던 여성들의 탈주를 돕는 몬스터 여신 해방전사처럼 보인다. 여전히 심령술을 믿고 있는 캐리스는 자기 반려견 위다가 자신을 구원하려고 환생한 지니아라고 믿는다. 캐리스의 주술적인 주장에도 토니와 로즈는 캐리스만 행복하다면야 뭔들, 하면서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다. 이 단편은 노년에 접어든 여자들이 앙심에서 풀려나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는 간결한 우화다. 연륜이 베풀어준 여유와 인생의 지혜라고나 할까?
『스톤 매트리스』를 읽다 보면, 지구별의 재앙 이후에도 애트우드는 불구의 시간성을 살아남아 “동전 한 닢 주면 이야기 한자리해 드리지요”라면서 미래 세대들을 모닥불 주위에 둘러 앉혀놓고 이야기보따리를 청산유수로 풀어놓을 것만 같다. 마치 『미친 아담』 3부작에 등장하는 토비가 신인류에게 멸종한 과거 인류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