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계 미국인 애브니 도시의 장편 『설탕을 태우다』는 제목 때문에 달고나를 연상시켰다. 달고나의 단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타이밍이 중요하다. 설탕이 녹아서 카라멜화가 되는 순간을 제대로 포착해야만 치명적인 단맛을 즐길 수 있다. 한눈을 팔다가 설탕을 태우면 유혹적인 단맛은커녕 쓰디쓴 맛을 보게 된다.
『설탕을 태우다』는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 관계라는 세월만큼 오래된 이야기를 다룬다. 그것이 아무리 해묵은 관계라 할지라도 어떤 정치·종교적, 역사·문화적 맥락 속에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따라 차이와 반복의 색다른 이야기가 된다. 사회적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는 불량한 소녀가 여기 있다. 여성 독자로서 나는 기존 질서에 반항하는 ‘나쁜 소녀’의 탈주에 내심 응원하는 심정이 된다. ‘나쁜 소녀’ 타라는 젖이 불어서 블라우스가 젖는데도 딸에게 젖을 물리지도 않고 매일 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타라는 ‘인도식’ 가부장제에 맹종하는 시어머니, 근대적 의상을 걸친 남편의 전통적인 순응주의에 숨이 막혔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반면 절대적 약자인 ‘나’의 시선에서 본다면, 타라는 고약하기 짝이 없는 엄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출하여 아슈람 종파에 입문한다. 그녀는 아슈람 지도자 바바의 정부가 되고, 이후에는 떠돌이 예술가 레자 파인의 애인이 된다. 그곳에서 ‘나’는 엄마의 사랑에 허기진 채 홀로 버티는 법을 터득한다. 세 살짜리 ‘나’의 기억 속에 엄마는 딸을 방치하고 외로운 유령으로 만든다.
‘내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피라미드 안에 있는 거인이다.’(89쪽) 그것이 ‘나’가 각인한 최초의 기억이다. 그곳은 인도의 푸네 지역에 있는 허름한 아슈람 사원이다. 거대한 흰 피라미드 주위로 작은 피라미드들이 하얀 원주처럼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세 살짜리의 눈에 비친다. 아슈람교는 원래 흰 옷만을 걸친다고 한다. 이 소설의 원제는 아슈람 신도임을 상징하는 『흰 옷을 걸친 소녀Girl in White Cotton』였다. 거대한 흰 거인 곁에 앉아 있는 작고 흰 피라미드가 ‘나’의 엄마다. 아이의 시선으로 본 광란의 무리들은 무섭고도 끔찍하다. 엄마는 아슈람 구루 바바의 신부가 되지만 엄마 이전에 칼리 마티가 그의 총애를 잃고 엄마에게 신부의 자리를 넘겨준 것처럼, 엄마 또한 새로운 신부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뒤로 물러나 할렘의 신부들과 함께 그곳을 돌보는 파란 눈의 대지의 어머니 칼리 마티와 달리, ‘나’의 엄마는 그곳을 박차고 나온다. 그때가 1989년이었고 그 사이 ‘나’는 일곱 살이 되었다.
이 소설에서 그로테스크한 아슈람 종파가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린 딸의 부식된 기억만으로 전달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아룬다티 로이가 『작은 것들의 신』이나 『지복의 성자』에서 종교의 정치경제학을 거시적으로 지도화한다면, 『설탕을 태우다』에서 애브니 도시는 어린 화자의 파편화된 기억으로 아슈람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종교적 열정과 광기 — 아무리 기괴한 밀교 의식일지라도 — 는 어린 ‘나’만큼이나 독자들 또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난해함 자체가 종교에 대한 쉬운 판단을 허락하지 않는 작가의 의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유한 친정, 시집 모두 버리고 가출이 능사인 엄마, 타라 탓에 ‘나,’ 안타라는 학교도 못 가고 글자도 깨우치지 못한다. 대책 없이 아슈람 사원에서 뛰쳐나온 모녀는 클럽하우스 앞에서 동냥하는 처지가 된다. ‘나’의 엄마는 그런 상황에서도 수치를 모르는 사람처럼 나에게 군림한다. 체면을 구긴 아버지는 재혼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나’를 기숙학교에 보낸다. 그곳에서도 고약한 수녀 테레사 탓에 ‘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미대에 진학하고 예술가가 되기로 작심한다.
성인이 된 지금 안타라는 인도계 미국인 딜립과 결혼하여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안타라는 자신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엄마가 언제든 망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런 마녀 엄마가 느닷없이 치매 진단을 받는다. 평생 강자였던 엄마에게 앙심을 품었던 “내가 엄마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엄마의 불행은 ‘나’에게 달콤한 심리적 보상이 된다. ‘나’는 엄마가 나에게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도록 해주고 싶다. 그런데 엄마가 기억을 잃고 행복한 치매 상태가 된다면? 엄마의 고통을 보면서 맛보았던 ‘나’의 달콤한 복수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기억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가 엄마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가 된다.
치매 엄마는 무기력한 약자가 되기는커녕 더욱 막강해진다. 엄마는 선별적인 기억을 통해 ‘나’에게 망신을 주고 모욕적인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나’에게 거짓말쟁이, 배신자라고 소리친다. 엄마로 인해 ‘나’의 비밀이 탄로 난다면 지금의 안정된 ‘나’의 삶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와 ‘나’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치매 엄마와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나’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일삼는 작화증자들처럼 보인다.
비밀이 들통 날까 두려워서 ‘나’는 엄마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지만 도무지 소화시킬 수가 없다. 엄마는 ‘나’의 목구멍에 돌멩이처럼 박힌다. ‘나’ 안에 갇힌 엄마가 오히려 나를 먹어 치운다. 엄마를 삼킴으로써 내가 곧 엄마가 된다. ‘나’가 된 엄마는 내 남편, 내 아이, 나의 집 등, 나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나’는 엄마 타라Tara에 맞서는 안타라Un-tara가 되려고 노력한 끝에 결국 엄마의 자리에 서게 된다. ‘나’는 엄마로부터 분리되지도 해방되지도 못한다. 소심하고 보수화된 ‘나’는 엄마의 욕망을 모방하는 왜소해진 또 하나의 타라An-tara에 불과해진다.
만약 이혼을 하게 된다면 예술가로서 ‘나’의 삶도 끝장날 것이다. 남편 딜립의 경제력에 의존한 채 가정주부로 살아온 내가 직장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렇게 되면 독립적인 예술가로서 커리어도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딜립과의 관계를 안정시켜줄 수 있는 확실한 매개가 ‘나’에게 절실해진다. 그것이 아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나’의 딸 아니타를 보면서 ‘나’는 내 엄마를 용서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할머니 나니 ― 엄마 타라 ― 나 안타라 ― 나의 딸 아니타의 계보가 영원 반복될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얽히고설킨 여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변주되는 섬세한 차이는 달콤씁쓸한 애도의 풍경을 이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