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앨리스 먼로가 타계했다. 노벨상 수상 작가였던 그녀가 10년 동안 치매를 앓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작가가 언어를 잃어간다면? 그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영화 「아이리스」는 아이리스 머독의 일대기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을 전공한 철학자이자 영문학사가 기억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다. 아이리스는 자유를 지고의 가치로 여겼지만 알츠하이머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나이 들어 BBC와 진행한 한 인터뷰에서 대담자가 그녀에게 언어란 무엇인가 물었다. 언어의 아름다움과 설득력을 얘기하던 도중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언어가 사유의 고향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언어를 상실한다는 것은 자기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실향민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영화에서 패닉 상태에 빠진 아이리스노년의 아이리스는 주디 덴치가 맡았다의 막막하고 망연한 표정이 떠오른다. 평생 자유롭고 자기 삶에 주도적이었던 아이리스가 두려움에 떨면서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을 때, 남편 존 베일리는 마침내 당신이 오롯이 내 차지가 되었군, 하면서 보복하듯 그녀를 애증으로 보살핀다. 앨리스 먼로의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도 그와 어슷비슷한 치매 이야기가 나온다. 치매와 더불어 살아가기를 실천하다 보니 요즘은 이처럼 치매 이야기에 꽂히게 된다.
앨리스 먼로는 우리 시대의 체홉에 비견되는 탁월한 단편 작가이고 단편집 또한 다수다. 그중에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에 실린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몇 번 읽을 기회가 있었다. 이 단편은 여러 번 읽었지만 여전히 뭔가 미흡했다. 어떻게 읽어야 제대로 읽었다며 흡족한 마음이 들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단편집 제목처럼 구애, 사랑, 결혼 플롯이 끝나고 생애의 종착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두 번째 읽을 땐 이 단편을 영화화한 「어웨이 프롬 허」2006 때문에 비교하면서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재상영2015은 앨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2013을 받은 영향이지 않았을까 했다. 먼로의 노벨상 수상은 캐나다 작가로서, 여성 작가로서, 단편 작가로서 모두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사실상 은퇴작인 『디어 라이프』2012 직후에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되었으니, 이 단편 속의 피오나처럼 자신의 기억력이 퇴행하고 있음을 먼로 또한 인지하고 있었을 터였다. 노벨상 수상은 생존 작가에게 국한된다는 점에서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하면서 휘발하는 기억력에 쓸쓸해했을까?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이리스 머독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마당에, 그까짓 노벨상쯤은 까마득히 잊어버렸을까?
앨리스 먼로를 애도하면서 다시 한번 이 단편을 읽었다.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치매를 인생에 대한 일종의 은유이자 아이러니로 다루고 있다. 치매로서 산을 건너가는 존재와 동행하는 ‘곰’이 있다면 둘의 관계는 어떨까?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제목에 언급된 ‘곰’이라는 단어는 이 단편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다. 동요의 제목을 살짝 비튼 ― 동요의 제목은 ‘The Bear Went over the Mountain’이고 이 단편의 원제는 ‘The Bear Came over the Mountain’이다 ― 이유는 뭘까? 도대체 곰은 누구인가? 혹은 누가 곰일까? 동요에서처럼 곰이 산을 넘어가 버린 것이 아니라 넘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은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도돌이표라는 것일까?
곰이 산을 오르네,
곰이 산을 오르네,
곰이 산을 오르네.
구경을 하려고.
보이는 것은 반대편 산
보이는 것은 반대편 산
보이는 것은 반대편 산
.......
동요에서 곰은 구경을 하려고 산을 오른다. 그 산에 도착하면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멋진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저쪽 산 또한 이쪽 산에서 보았던 풍경의 반복일 따름이다.
피오나와 그랜트는 대학 시절 만났다. 자유분방하고 급진좌파인 어머니와 부유하고 저명한 심장병 학자지만 가모장 아내에게 순종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피오나는 세상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주변에 많은 남자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가난한 시골 출신인 그랜트에게 먼저 청혼했다. “우리가 결혼하면 재미있을까요?”라는 치기 어린 이유로. 하지만 타인의 눈에는 그랜트 자신이 “기이한 피오나의 취향에 따라 선택된 또 한 마리의 애견처럼 보였을지”427쪽도 몰랐다.
그들의 구애 과정과 반세기에 가까운 결혼 생활은 처음 두 문단으로 끝난다. 이야기는 어느새 50년을 훌쩍 건너뛴다. 흰머리가 희끗한 일흔 살의 피오나가 집을 떠나기 전 부엌 바닥에 찍힌 실내화 얼룩을 보고 짜증스럽게 말한다.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얼룩이 묻어난다면서 피오나는 한숨을 내쉰다. 피오나는 아직 우아함은 잃지 않았지만 기억력은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지금 요양원으로 떠나는 참이었다.
요양원 측은 피오나에게 적응 기간을 주어야 하므로 한 달 동안은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그랜트에게 일러준다. 한 달 후 그랜트는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의 설렘을 안고 요양원을 방문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에는 수치심, 경계심, 두려움이 뒤섞인 설렘이라고 한다면, 피오나를 만나러 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순전한 설렘으로 가득하다. 요양원에 이르니 그의 기대와 달리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그사이 피오나는 그야말로 낯선 여자가 되어서 그랜트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지금 피오나가 가면을 쓰고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밀려든다. 그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지금, 그녀가 그를 외면하다니. 그랜트는 도무지 이 사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 달 사이에 피오나는 오드리라는 입소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단기 입소자였던 오드리가 떠나자 피오나는 상심하여 쇠약해진다. 실의에 차서 꼼짝하지 않으면 정말로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면서 간호사 크리스티는 무슨 조치를 취하라고 그랜트에게 귀띔한다.
평생 바람을 피웠음에도 믿거나 말거나 그랜트가 피오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은 결코 없었다. 한때 그에게는 “너무 많은 여자들이 다 자신의 것처럼 보였던 시기가 있었다.” 마치 자신이 가르친 아이슬란드 영웅시에 나오는 영웅인 것처럼, 그는 모두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사실에 두려워서 몸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한때는 사랑이라고 말했던 한 무리의 여성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짓밟았다는 이유로 그를 고소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선동에 놀아난 순진하고 바보 같은 여자들이었다. 대학에서 이른 퇴직을 하는 것으로 그 일은 그럭저럭 무마되었다. 그럼에도 그가 피오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결코, 결코 없었다.
진심으로 피오나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 그랜트는 결단을 내린다. 그는 오드리의 집을 찾아 나선다. 오드리를 요양원으로 다시 데려오려면 그의 부인인 메어리언과 어떤 방식으로든 협상을 해야만 했다. 메어리언은 그의 장인 부부나 피오나처럼 뜬구름 잡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랜트에게 사회주의자들은 물려받은 재산이 많거나 혹은 타고난 어리석음 덕분에 삶의 진실을 직시할 필요도 없었고 삶의 험악한 꼴을 경험할 기회도 없었던 몽상가들이었다. 반면 메어리언은 신기루를 쫓는 피오나의 가족들과는 달랐다. 천박하면서도 유혹적이고 탁월한 생존능력으로 어디서든 살아남을 인물처럼 보였다. 그녀는 ‘여지나무’ 열매양귀비가 좋아했다고 전해지는 과실 같은 여자였다. 그녀의 유혹적인 맛과 향에 이끌려 한입 베어 물었다가 ‘계산적 씨앗’이라는 돌멩이를 씹을 수도 있었다. 두 계산적 씨앗들이 유혹하고 협상한 끝에, 그랜트는 오드리를 데리고 피오나가 시들어가고 있는 요양원으로 향한다.
또 한 번 놀랍게도 피오나는 그사이 우아함을 회복하고 오드리가 누구냐면서 싸늘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랜트가 자신을 데리러 온 것에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피오나의 사랑이 이뤄지기를 바랐지만 그랜트의 행위는 예나 다름없이 피오나를 배신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산을 넘어온 곰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피오나는 치매였을까? 그녀는 평생 얼룩을 묻히고 다닌 그랜트에게 보복하려고 치매를 연기했을까? 혹은 재미 삼아 결혼했던 것처럼 재미 삼아 치매의 가면을 연출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곰은 누구일까?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제 곰은 누구와 동행하여 어디로 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