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여성 서사 장편소설이 늘어나는 것이 눈에 띈다. 『82년생 김지영』2016, 『세 여자』2017, 『체공녀 강주룡』2018, 『파과』2018, 『알로하, 나의 엄마들』2020, 『시선으로부터』2020, 『밝은 밤』2021 등 주로 X세대와 M세대 여성작가들이 써 내려가는 작품들은, 우리는 더 이상 『인형의 집』의 노라가 아니며 (우리의 의지에 반反하는) 타자이거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2등 시민이 아니라는 관점을 고수하고 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거의 한 세기 전의 할머니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작품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여성 서사의 중요한 변곡점인 듯한 이 현상을 통해 여성작가들의 작가적 욕망을 짐작해본다. 여성작가들은 이제 조모, 증조모 세대를 현재로 귀환시켜 여성의 새 계보를 세워 나가려 하는 것은 아닐까.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새로 쓰는 윗세대 여성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을 읽어보기로 한다.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가 출간된 이듬해인 2018년, 박서련 작가는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이자 평양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문제적 인물 강주룡을 호명, 세상에 내놓는다. 『세 여자』와 『체공녀 강주룡』의 주인공들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나름의 방식으로 뜨겁게 살았던 혁명적인 인물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 여자』의 주인공이 신식교육을 받은 맑스주의 모던걸 3인방 ― 주세죽1901~1953, 허정숙1902~1991, 고명자1904~1950 ― 즉, 배운 여자들인 데 비해 『체공녀 강주룡』의 주인공은 당대 여성 대부분이 처했던 3종 세트의 불리한 환경 ― 가난, 무지, 봉건의 가부장적 체계 ― 속에서 배우지 못했지만 환경을 박차고 나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낸 인물이라는 점이다.
내가 이 작품에서 주목한 것은 작가의 시선과 디테일이었다. 박서련의 주인공에 대한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일관된 페미니즘적 관점이다. 주인공은 가부장 체제와 봉건사상이 온전히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현대 여성도 울고 갈 정도로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비참하지도 비겁하지도 않다. 홀로이지만 외롭지 않다. 업신여김 받지만 업신여기는 사람을 되받아치거나 무시할 강단과 기개가 있다. 거친 말투와 투박한 표현 속에 따뜻한 애정이 숨어 있으며 못 배웠지만 무지하지 않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언변이 아닌 행동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작가는 주인공이 여성 그리고 노동자라는 입장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의 육성을 구현해 낸 것이다.
여기에 더하는 것이 디테일이다. 문장이 곧 성격이라 했던가, 일하는 여성의 육성을 듣는 듯한 간결 시원하며 거칠거칠한 문체로 독자를 압도한다. 예를 들어, 당대 여성의 하루치 가사노동을 마치 노동요인 듯 신나게 구현, 피해자의식에 찌든 병약한 문체는 사전에 차단한다.
발채지게를 담뿍 채우고 나면 바삐 집으로 가 나머지 집안일을 하고 서방 먹일 반상을 보아야 한다. 주룡은 구르는 것인지 달리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되도록 발을 재게 놀리면서도 잔가지 하나 발채바깥으로 흘리지 않는다.
천변에 나가 빨래를 해 와서 널고, 보리방아를 찧고, 무채를 썰어 꿰어 말리고, 시간이 남아 정주간 황토칠을 싹 새로 하고, 식구들 밥상을 올리고, 야학에 나가려는 전빈을 배웅하고, 밤불을 홧홧하게 때고, 큰할머니부터 형님네까지 문안을 돌고, 방에 들어앉아 관솔불을 밝히고 식구들 옷깃을 뜯어고친다.
이만하면 오늘도 떳떳하다.(34쪽)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으로 어마무시한 양의 노동을 씩씩하게 해치우는 모습을 통해 당대뿐만 아니라 현대의, 몸으로 하는 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씩씩한 여성들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작품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결혼과 독립운동, 사별의 과정이 1부에 담겨있고 2부에는 친정집에서 실질적인 가장으로 노동을 하다 딸을 팔아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는 아버지의 의사를 거부하고 독립하여 평양 고무공장의 공원으로 취업, 그 후 노동운동을 전개, 단식에서 아사에 이르는 독립적인 삶과 마지막을 구현해 놓았다. 1부가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 ‘하는’ 주인공을 묘사했다면 2부는 꿈을 꾸고 꿈을 나누기 위해 행동하는 주인공을 그려낸 것이다.
강주룡은 ‘모단 껄’신여성 되기를 꿈꾸나 고무 공장 남자 반장으로부터 빈축을 사고 머리채를 휘어잡힌다. 여공원 주제에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서 모단 껄 흉내를 낸다는 것이다. 남자 반장은 ‘모단 껄은 기생 아니면 학생’으로 인식한다. 여공은 학생이 아니므로 기생이며, 기생이라면 ‘내가 늬들을 데리고 놀아줄 터이니 모단 껄이 되고 싶으면 내게 오라’는 등의 모욕적인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당시의 봉건적 남성들의 시선에 모던걸은 곱게 비추어지지 않았다. 쓸데없이 배움만 커서 나대기 좋아하는 허파에 바람 든 여자, 머리를 자른 여자모단毛斷걸, 야단스런 유행을 퍼뜨리며 사치와 방종을 일삼고 자유연애를 구가하는 허영기 가득한 여자 등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일쑤였다. 한편 여성들이 이해하는 신여성은 남성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엄마의 말뚝 1』에는 딸을 신여성 만드는 것이 평생소원인 엄마가 등장한다. 엄마가 아는 신여성이란, 신식교육을 받게 하여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여성을 의미한다. 자기 의지대로 산다는 점에서 강주룡은 이미 신여성이다.
누가 나더러 모단 껄이 아니라 했다고 내가 정말 모단 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자기가 모단 껄이 아니라는 것, 모단 껄 되고 싶은 심정이 언감생심으로 보이리란 사실은 주룡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으니 도무지 모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장 때문은 아니다.
반장 같은 것은 모단 껄 되기에 요만큼도 방해가 될 수 없다.
구남성의 박해를 받았으니 이는 도리어 모단 껄 되기의 제일보에 진입한 것이다. (140쪽)
그러기에 강주룡은 임금 17% 삭감에 반대하는 파업 주도, ‘아사동맹’ 결성과 단식투쟁, 평양 을밀대 고공농성에 이르는 의심 없고 거침없는 운동을 주도해 나간다. 을밀대에서의 강주룡의 외침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賃金減下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平壤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賃金減下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랴는 것입니다. (…) 나는 平元평원 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賃金減下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끗까지 賃金減下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 노동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여 나를 여기집웅서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웅 우에 사닥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저 죽을 뿐입니다.
― 無號亭人(1931.7), 「乙密臺上 滯空女: 女流鬪士 姜周龍 會見記을밀대상의 체공녀: 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23호
이러한 외침은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또 다른 강주룡을 탄생시켜 “정리해고 철회하라” “해고는 살인이다”로 요약되는 최근의 고공농성 외침에 이른다.
작가는 이 부분을 좌시하지 않았다. 작품 속에서 주룡이 잠든 어린 노동자 옥이의 이마를 쓸어주며 “앞으로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독백하는 부분은, 90년 전의 한 ‘사람’이 뒤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강주룡을 귀환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강주룡을 귀환시켜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