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다.”(257쪽)
평생 문학을 신봉해온 사람들에게도 늘 의심은 따라붙는다. 나는 왜 이 허구의 이야기들을 읽고 또 읽는 걸까? 어째서 책 한 권을 내려놓자마자 게걸스럽게 다음 읽을거리를 찾아 나서는 걸까? 알고 보면 남이 지어낸 이야기, 내 이야기도 아닌 전혀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인데? 더 많은 이야기를 읽을수록 의심은 커진다. 막연히 찾아 헤매는 ‘완벽한 단 하나의 이야기’(그게 어떤 이야기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왠지 찾기만 하면 단박에 알아볼 것만 같은)를 끝내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그래서 이 방황을 그만 끝내고 비로소 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란 예감이 점점 더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문학의 현실적 효용성, 그러니까 소설책을 읽어야 하는, 아니 아이들에게 책을 읽혀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온갖 주장들이 있지만 아마추어(반드시 아마추어야만 한다. 문학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책의 효용성은 자명하다) 문학 애호가들은 그게 전부 개소리라는 걸 알고 있다. 문학에 눈곱만한 효용성(공감 능력을 키운다든가)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남이 지어낸 이야기에 대한 이 터무니없는 집착과 불가해한 열정을 설명하기엔 그저 미미하니까.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우리는 왜 남의 이야기 따위를 읽는가’라는 의문을 가장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 소설이다. 이 책의 해설자는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예술 장르를 읽을 때 펼쳐지는 감정의 모든 양상을 재인식”하게 해준다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처음으로 나의 오랜 독서 행위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플로베르의 앵무새』처럼 글을 쓰는 사람(즉 작가)이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즉 독자)의 관점과 심리에 끝까지 집중하는 소설은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모든 소설을 쓰는 사람은 어쨌든 작가이고, 자신을 작가의 자리에 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독자를 자기 오줌발을 받아주는 눈 달린 담벼락쯤으로 여기는 작가들(‘독자라고? 내 이야기를 읽어준다는 사실 이외에 그들에 대해 궁금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는)도 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화자(이자 주인공 독자)인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는 꽤 긴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충실하고 겸손한 독자의 입장을 고수하며 결코 작가인 척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설의 거의 끄트머리에 가서 마지못해 내밀한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조차, 그는 자기 인생에 대해 ‘쓰지 않고’ 부인의 인생을 ‘읽으려고’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친절한 작품 해설을 먼저 읽지 않고 곧장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책의 절반이 다 지나도록 의구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대체 이게 무슨 얘기일까 종잡을 수 없다는 정도의 의문이 아니라 (줄거리가 파악되지 않는 소설은 많으니까) 아예 책을 잘못 집어 들었다는 근본적 의구심 말이다. 소설책을 고른다는 것이 그만 문학, 특히 작가 플로베르의 연구서를 집어 든 게 아닌가? 혹은 (줄리언 반스의 또 다른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어본 독자라면) 작가가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두세 번쯤 표지를 다시 확인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란 말에 (언제부터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은 온갖 이해 안 되는 것들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겨우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 소설을 다 읽은 후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고 『보바리 부인』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감상을 밝히는 독자들도 많다. 물론 나 역시 그들 중의 하나다. 작가 플로베르에 대해 엄청나게 흥미롭고 시시콜콜한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것, 항상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데 아무리 봐도 바람난 여자 이야기일 뿐이었던 『보바리 부인』의 문학적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은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성과다.
하지만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결코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설사 귀스타브 플로베르처럼 위대한 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이것은 ‘독자’에 대한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열광적인 독자이지만, 사실은 어느 동네 도서관마다 한두 명쯤은 꼭 있는 평범한 문학 애호가. 브레이스웨이트는 예순 살이 넘은 은퇴한 홀아비 의사로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아마추어 연구가다. “음식과 독서, 낯설지 않은 곳에서의 여행을 좋아하며 조지 엘리엇과 새커리를 좋아하고 오든과 스펜서, 이셔우드 집단을 싫어하고, 장차 죽을 때를 위하여 버지니아 울프는 건드리지 않고 있는 사람.”(146쪽) 그에 대한 소개는 성별과 직업, 그리고 한두 작가의 이름만 바꾸면 나에 대한 소개서라고 해도 될 만큼 전형적이다. (문학 애호가들이란 어쩌면 이렇게 비슷비슷한지!)
물론 충실한 독자인 그에게도 야심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들의 숨은 야심이란 언젠가는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다투고 있다. 하나는 플로베르에 관한 것, 다른 하나는 엘렌에 관한 것,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것이다.”(127쪽)
결국 플로베르에 대한 문학적 연구와 전기적 사실의 콜라주 뒤에는 브레이스웨이트의 아내의 간통과 자살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렇지만 브레이스웨이트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끝까지 미루어둔다. “내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쯤에는 당신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신이 책, 앵무새, 읽어버린 편지, 곰, 애니드 스타키 박사의 의견, 심지어 의사인 나 자신, 다시 말해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의 의견까지 충분히 들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책이란 아무리 우리가 그것이 곧 삶이길 바란다 하더라도 삶 그 자체는 아니다.”(127쪽)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 소설의 여주인공 보바리 부인을 통해 자기 부인을 읽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기 부인을 읽고 전달함으로써,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보바리 부인은 간통을 저지르고 자살을 했다. 엘렌은 간통을 저지르고 자살을 했다. 샤를 보바리는 부인을 사랑하고 잃었고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엘렌을 사랑하고 잃었고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는데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떠벌리는 것에 대한 혐오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직접 말함으로써 결코 자신을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이다. “언어란 갈라진 주전자와 같아서 우리가 그것으로 연주를 하면 겨우 곰들이나 장단 맞춰 춤을 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그 언어로 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갈망한다.” 플로베르의 이 말은 소설 속에서 두 번이나 인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이스웨이트는 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뒤로 숨는다. 그는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기차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유리창에 비친 희미한 그림자, 그것이 바로 네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내 모습일 뿐.” 위대한 작가에 대한 장광설이 끝없이 이어지는 와중에, ‘나’에 대한 이야기는 사이사이에 잠깐 스쳐 가고 부인 엘렌에 대한 ‘순수한 이야기’가 제일 마지막에나 나오는 것은 극적 효과를 노리는 작가적 장치가 아니라, 충실한 독자가 자신의 삶을 읽어낼 수 있는 (그리고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
우리는 왜 ‘남의 이야기 따위’를 읽고 또 읽는가? 이 의문은 우리는 왜 이야기가 될 가치도 없는 평범한 삶을 살고 또 사는가 하는 의문과 비슷하다. 나의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독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평범한 삶은 나보다 약간 비범한 사람들의 삶이 이미 결산하고 흡수해버려서 의미 없는 삶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가? (…) 하지만 그런 점에서 삶이란 독서와 약간 비슷하다. 전에 내가 말했듯이 어떤 책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전문 비평가에 의해 이미 되풀이되고 확장된 것이라면 당신의 독서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것이다.”(253쪽)
나의 독서를 통해 나의 삶은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설명 없는 삶에 나의 독서는 설명을 부여해주니까.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설명이라 할지라도, 독서가 나의 것이라면 그 설명 또한 나의 것이니까.(*)
사족. 줄리언 반스는 1984년에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출간했고, 2008년에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다. 물론 자살은 아니었지만, 반스는 아내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5년 후에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통해 부인의 죽음을 다시 읽어내려고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