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운명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독서 중독자에서부터 책을 만드는 사람들, 책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쓰인 책을 다시 쓰는 작업에 매달리는 번역자, 연구자, 비평가, 서평가 등등까지. 만일 이들에게 책에 대한 사랑 고백을 듣게 된다면, 각각의 내밀한 사연들은 다를지라도 저주에 가까운 자기혐오와 신앙에 가까운 절대적 믿음 사이를 격하게 갈팡질팡하는 감정의 등고선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이 존재하기에, 이들은 다른 세상을 열망하게 되었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이방인이 되어버렸으며, 다프네를 쫓는 아폴론처럼 상대책에게, ‘결코’, ‘무한히,’ 인정받을 수 없는 고독한 몸부림의 열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니 이들에게 바치는 작은 소네트 하나쯤은 존재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창실 옮김, 문학동네, 2016은 책에게 바치는 간절한 사랑고백이다. 모든 연애편지의 형식이 그러하듯, 이 소설에는 자신의 진실함을 고백하는 ‘나’가 있고, 애절함에 응답하지 않는 무심한 당신책이 있으며, 당신과 ‘나’ 사이의 사랑을 용인하지 않는 세상이 있다. 사랑에 빠진 자가 사랑하는 자를 잃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한 마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이상, 이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찬란한 열정a passion은 또한 수난the Passion이기도 해서, 안으로는 열광과 격정에 사로잡히고, 바깥으로는 미치광이라는 비난에 둘러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라는 매혹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미친 것은 나였을까요? 세상이었을까요?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19쪽)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한탸는 삼십오 년간 폐지를 압축하면서 책을 사랑하게 된 폐지 압축공이다. 종이를 다룬다고 모든 폐지 압축공이 책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책의 아름다움을 알아버린 압축공만이,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고자 하고, 구해내고자 하고, 결국에는 해방시키고자 하는 압축공만이 사랑을 감행할 자격이 있다. 한탸는 이 사랑을 감행하기 위해 카인의 고독을 선택한다. 진정한 책들은 폐지 더미 속에서도 빛을 내뿜고, 한탸는 날렵한 사냥꾼이 되어 재빨리 아름다운 물고기들을 건져내 자신만의 독서 의식을 행한다. 그의 독서는 읽는다기보다는 음미하는 것, 「아가서」의 술람미처럼 비밀의 방에서 내밀한 시간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 “한 불멸의 정신이 침묵 속에서, 밤의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그때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언어로 말을”(74쪽) 건네 오고, 더 없이 아름다운 다른 세계가 그를 맞아들인다.
그곳에는 사실 너머의 진실이 자리하기에 그는 현실에서 낙인찍힌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책의 세계에 몰두해 있으면, 현실은 지하세계와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합쳐진다. 지상이든 지하든 생명체들은 어디서나 끊임없이 생사를 건 대大전쟁을 벌이고, 하나의 전쟁이 마무리되면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될 뿐이다. 때문에 한탸는 자신을 스쳐간 두 명의 연인과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삼촌만을 현실에 남겨놓고 나머지 인간 군상들을 지하세계로 배치한다. 동시대 역사를 글로 쓰거나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그의 동료들 역시 중앙난방 제어실이나 하수구에서 작업부로 일하는 지하세계의 일원일 뿐이다.
“어느 꾸러미가 괴테나 실러, 횔덜린, 니체의 무덤으로 쓰이는지 아는 사람도 나뿐이다. 나 홀로 예술가요 관객임을 자처하다 결국 녹초가 되어버린다. 날마다 죽을 것만 같은 피로에 찢기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15쪽)
한탸의 비극은 자신 역시 지하세계에 속해 있는 폐지 압축공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랑의 정체는 그래서 애초부터 어긋나 있으며, 폐지와 배설물과 오물을 둘러싼 쥐들 무리의 격전장에서 그가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시끄러운 고독’ 밖에 없다. 책에 든 사고의 기름은 지혜의 야등을 밝혀주고, 맑은 물이 가득 찬 항아리처럼 그의 머리에서는 근사한 생각들이 흘러넘친다. 그의 사랑은 영원과 무한을 갈망하고, 칸트가 경외했던 별이 총총한 하늘만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자족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속한 지하세계의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폐지 압축공이라는 그의 직업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지식이 산 자의 영역으로 사고의 울타리를 가둔다면, 지혜는 신과 짐승 사이에서 위태로운 그네줄을 타는 필멸의 인간을 본다.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된 한탸의 내면은 세상을 향한 두 갈래의 지혜로 갈라져 분노의 칼을 든 예수와 체념 속에 물러나 앉은 노자老子가 끊임없이 대립한다. 예수는 세상을 바꿔서 미래로 돌진하자 하고, 노자는 세상을 버리고 자연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아 근원으로 회귀하자 한다. 한탸는 집시 연인이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버렸을 때 정의의 예수를 이해했고, 프로이센의 왕실의 귀중한 장서들이 나치의 전리품으로 몰수돼 무참히 파괴되었을 때는 무위無爲의 노자를 이해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밀물처럼 넘실댔다가 체념으로 얼룩진 허무의 썰물로 빠져나갔다.
이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한탸는 폐지꾸러미를 만든다. 폐지 압축공은 책을 쓰는 자가 아니라 책을 파괴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탸는 자신의 꾸러미를 브뤼헐이나 고흐 같은 거장들의 복제화로 치장하고 그것의 심장부에 자신이 선택한 지상의 양식 한 권을 심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최고의 예술로까지 끌어올리고자 하며, 자신의 꾸러미가 하나의 정신이기를, 다른 것들과 결코 같지 않는 유일무이한 하나의 목소리이기를 바란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고귀한 정신을 넘어서, 성서를 온몸으로 읽어내려 했던 신학자의 열정을 필요로 한다. “정말이지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신학자였어야 하리라!”(73쪽)
“내가 신봉했던 책들의 어느 한 구절도,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놓은 이 폭풍우와 재난 속으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113쪽)
역사는 전진하지만 또한 후퇴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치 시절을 통과하면서 씨름했던 그의 ‘시끄러운 고독’은 압축기 스무 대 분량의 성능을 지닌 대형 기계의 등장으로 전면적인 위기를 맞는다. 사회주의의 깃발을 따라 새롭게 열린 경제성과 효율성의 시대는 새로운 작업방식을 도입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었다. 책이 내뿜는 빛에 무관심한 노동자들, 노동하고, 보수를 받고, 휴가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는 젊은이들이 이제는 삼십오 년간 다뤄온 한탸의 압축기를 차지하려 한다. 꾸러미를 만드는 일이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는 데 바쳐지리라는 신념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한탸는 새롭게 배당된 자신의 작업에 적응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국내 정치』와 『국가 소식』 과월호를 구하러 오는 철학 교수는 다른 데서 또 다른 기회를 찾으라 하지만, 이 대형 압축기의 파괴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프라하 전체에서 아무 데도 없다.
솔로몬 왕은 젊은 시절에 「아가서」를 썼으나 노년에는 바니타스 바니타툼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어라.으로 삶의 균형을 잡았다. 그러나 한탸는 균형이 아니라 싸움을 선택한다. 한탸는 물러서기보다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가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자신의 결심을 알리는 최후통첩으로 마지막 꾸러미를 남몰래 제작한다. 세상이 받아보게 될 이 꾸러미에는 삼십오 년간 책에 대한 희망을 지켜 온 한 폐지 압축공이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복제화에 둘러싸여서 지복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예술가로 살아온 그가 손가락으로 짚고 있는 마지막 문장은 노발리스의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131쪽)이다. 그는 사랑하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으니, 염원하건대, 사랑받게 될 것이다.
문학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문자 ‘littera’는 성서를 읽고, 편찬하고, 주석을 달고, 해석서를 쓰는 기술을 의미했다. 성서와 결별한 이후 르네상스 시기부터 ‘littera’는 읽고 쓰는데 필요한 지식 일반, 특히 글을 쓰는 기술을 의미하게 된다. 오늘날 통용되는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은 ‘belle lettres’, 즉 아름다운 글쓰기라는 용어로 17세기부터 프랑스에서 따로 분화되어 사용되다가 18세기부터는 ‘litrérature’가 문학의 온전한 의미를 흡수하게 된다.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책을 읽는 행위가 아름다움에 이르고, 문학이라는 형태로 발현되는 과정에 대한 작가로서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신학자의 믿음과도 같은 책에 대한 희망이 선행되어야 한다. 책은 이런 점에서 작가가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담하게도 책에 대한 사랑이 온전하게 인정받은 시절은 인류 역사에서 그다지 흔치 않다. 소비에트 치하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시절에 쓰인 흐라발의 이 책은 정치적 검열을 피해 1976년 지하출판사에서 자비로 발간되었다가 민주화 투쟁인 벨벳 혁명의 성공과 함께 1989년에 공식 출판되었다. 흐라발의 체코는 1939년에 나치 점령을 겪었고, 해방 이후에는 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1968년에는 탈공산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으나 결국 좌절되었고, 바츨라프 하벨이 이끄는 ‘시민포럼’이 1989년에 벨벳 혁명을 주도하기까지 오랜 시간 정치적 자유를 기다려야 했다.
흐라발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 책을 쓴다는 것은 긴긴 지하생활의 절망을 버티어내는 것이자, 세상을 향해서 품은 한 줄기 희망을, 혹은 책이 선사할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심연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비상의 날개가 필요하다. 이런 점 때문에 흐라발의 소설들은 전쟁이 아니라 풍자를, 절망이 아니라 위트를, 패배가 아니라 아이러니를 코드로 삼는다. 이런 그의 문학 기법은 비극적인 지혜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고자 했던 니체의 정신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흐라발의 디오니소스는 환영을 창조하는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말하지 않고 다만 노래하려 한다. 불우한 시절에 책이 겪는 비참悲慘에 관한 비망록이자 책쓰기에 관한 자전적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는 흐라발의 이 소네트를 위해 마지막으로 짧은 헌사를 하나 바친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이 명랑함보다 더 필요할 수 있단 말인가?*”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외』, 니체전집 KGW Ⅵ3 15,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9, 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