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여자의 성취는 또 다른 여자의 희생을 딛고’란 말을 들으면 왜 죄책감이 드는 걸까? 남자의 성취를 위한 여자의 희생은 역사가 남성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안 당연한 이치였던 반면 여자의 성취는 특별히 미안해해야 할 것이어서? 누구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희생당하는 또 다른 여자에게? 아니면 여자의 야심에 놀란 남자에게? 남자는 자신들의 자리에 대해 비교적 명쾌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는 사회적 시선인 남자들의 시선과 자신의 내밀한 시선이라는 두 시선 사이에서 갈라진다.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타자를 희생시키는 죄책감 외에도 여자는 자신이 누구길래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건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여자는 희생자의 좌석을 벗어나면 놀랍게도 죄책감을 느낀다.
희생이란 남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과 남 중에 누굴 더 사랑해야 할까? 개인적 자유의 환상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가난이 문밖에서 상시대기 중인 모순된 자본주의세계에서는 당연히 ‘나’를 선택해야 한다. 혼자 살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밌고 충분히 벅차다. 그런데 여기 아직 ‘희생 영역’이 남아있다. 출산과 양육이 그것이다. 종을 유지시키는 여자 몸의 영역. ‘모성애’로 버텨온 마지막 영토.
남성작가들이 써온 문학 작품에서 중산층 계급 여자와 베이비시터와의 관계에서는 누가 승리를 거머쥐든 간에 중산층 여자에 대한 공격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계급 차에 의해 억눌렸던 증오는, 계급을 설계하고 유지하는 남자 대신 이상하게도 욕망을 좇아 계급을 붕괴시킬 위험이 있는 중산층 여자를 향해 분출된다. 그래서 자기 아기 대신 남의 아이를 돌보는 베이비시터의 희생은 반대로 이상화된다. 문학작품 속의 베이비시터는 모성의 피난처다. 희생하는 타자로서의 대표 존재다.
『달콤한 노래』는 그런 남성 작가들의 염원을 갈기갈기 찢는 소설이다. “아기가 죽었다, 몇 초 만에”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애면글면 보살피던 두 명의 아기를 죽인 백인 베이비시터 루이즈 사건의 전모다. 엄마 미리암과 아빠 폴과 루이즈가 맺는 권력관계에 대한 소설이고 루이즈와는 또다른 유색인종 베이비시터들의 이야기이기며, 베이비시팅에서 거리를 둔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자주인 미리암과 베이비시터 루이즈의 관계는 불변하는 상하관계가 아니다. 금쪽같은 아이를 맡긴 상태이므로 엄마 미리암이 하녀 루이즈에게 무조건 강하게 나갈 수 없다. 게다가 루이즈는 미리암이 무엇을 상상했던 늘 그 상상을 넘어서는 베이비시팅을 보여줘서 시간이 갈수록 루이즈에게 의존하게 되고 둘은 한 링 안의 레슬러들처럼 아슬아슬하게 엎치락뒤치락한다. 아랍계 프랑스인인 주인 미리암과 백인 하녀인 루이즈는 돌봄노동 속에서 서로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법대를 졸업한 미리암은 폴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은 뒤 ‘애들이 날 산 채로 잡아먹는구나’ 라고 탄식했다. 변호사 일을 시작하려 해서 베이비시터 루이즈를 ‘운 좋게’ 구한 것이다. 미리암이 성취욕 강하고 독립적이면서 신경질적인 중산층 아랍계 프랑스인이라면, 백인 루이즈는 문학작품에서 만났던 베이비시터들과 다르다. 루이즈의 비밀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띄엄띄엄 밝혀지는데, 자기 딸은 버려둔 채 남의 아기들을 끔찍하게 사랑했고 결국 자기 딸은 내버렸던 과거를 가졌다. 자기 원룸에 덕지덕지 낀 곰팡이는 그냥 두지만 일종의 ‘점령지’인 미리암의 집은 행복의 가정으로 연출하는데, 미리암의 아파트는 점차 루이즈의 집처럼 느껴지고, 루이즈의 원룸은 ‘괄호’ 같은 방일 뿐이라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된다.
두 여자의 관계는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진부한 이간질을 증명하는 식도 아니고, 피해자로서 연대하는 훈훈함에서도 비껴난다. 두 여자는 공모자다. 무엇을 위한 공모일까. 루이즈는 주인여자를 물리치고 그 집안의 가장과 결혼해 집안을 차지하려는 계급상승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 어차피 계급이 상승되면 루이즈는 주인으로서 처리해야 할 책무가 많을 텐데, 극심한 가난과 억압 속에 살아와 자신감이라곤 없는 하녀 루이즈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마흔 살이지만 아이 같다고 표현되는 이 베이비시터의 욕망은 정확히 여주인 미리암의 욕망이다. 루이즈가 원하는 건 그 집을 완벽한 인형의 집으로 가꾸고, 유일한 능력인 베이비시팅을 통해 끝없이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의 상태로 머무르는 것이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한국에 내한해 가졌던 대담에서 “엄마는 두 가지 공포를 갖는다”고 했다. “아이가 언제든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동시에 아이가 너무 많이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공포”가 그것이다. 미리암과 루이즈는 자신의 아이들을 다른 이에게 맡겼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미리암은 루이즈의 과거에 대해 모르고, 알았다면 결코 채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밀을 모르는 미리암은 아이들을 완벽한 역할을 수행하는 루이즈에게, 루이즈는 딸아이를 거친 세상에 버려두었다. 미리암과 루이즈는 아이들과 ‘적절한 거리’를 갖게 되어서, 질식할 듯 가까운 아이란 타자가 주는 불안에서 벗어나 숨을 쉰다. 동시에 이런 ‘적절한 거리’를 통해 아이와 함께 있는 환상을 완성시킨다. 양육 속에 숨겨진 나르시시즘적 순간이다. 아이들에게서 전염되는 순수한 순간과 생명의 아름다운 시간을 미리암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루이즈는 직업의 세계와 양육을 일치하면서 자신의 원룸에서 아주 먼 환상적인 세계를 미리암의 집에서 만들어간다.
두 여자의 공모는 아이가 주는 불안은 도려내고, 완벽한 직업과 양육에서의 즐거움을 가지려는 이상적 세계를 향한 공모다. 베이비시터 루이즈는 살면서 자기 방을 가진 적이 없다. 일생을 극심한 가난의 공포에 시달리고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게 마땅할 정도로 부모와 폭군인 남편에게 견딜 수 없는 타박만 받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기회가 전혀 없었다. 불행했다. 겉으론 기품 있는 백인 여자이고, 늘 손과 머리를 변함없는 스타일로 가꾸며, 책 전체에서 반복되어 나오듯 마흔 살이지만 인형 같고, 아이 같은 루이즈는 정신병원에 머무르기도 했다. 아이란 건 대체 뭔가. 비연속적이고 혼돈스런 상태의 시간. 성장할 기회가 없었던 루이즈는 아이와 놀 수 있는 또 다른 아이의 상태다.
미리암은 루이즈가 피나 배설물 없는 인형이나 기계처럼 존재하기를 원한다. 루이즈가 가벼운 그림자 같은 존재로 양육을 완벽히 수행해야 자신이 양육에 참여한다는 환상이 지켜지기 때문이다. 루이즈는 미리암의 욕망을 수행한다. 미리암의 완벽한 엄마에 대한 열망의 형상화가 루이즈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유다. 루이즈는 실제로 소설 속에서 부분적으로 묘사될 뿐이고 실루엣처럼 흐릿하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가정은 환상이다. ‘모든 가정은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문제가 있기 마련이니까.’ 루이즈가 기계처럼 자신의 돌봄을 수행하지만 결코 기계가 아니다. 루이즈는 기계이기엔 부족한 ‘주체’다. 루이즈가 처리할 수 없는 커다란 빚이 폴과 미리암에게 알려질 때, 가족의 이미지는 위험에 처한다. 암울한 루이즈의 진짜 방이 수면 아래에서 백조의 발처럼 숨겨져 있어야 수면 위의 백조는 백조다워진다. 루이즈의 원룸이 미리암의 집에서 멀면 멀수록, 암울할수록 저 먼 환상적 미리암의 집에 대한 루이즈의 열망은 더 커진다. 그럼으로써 미리암과 루이즈의 환상은 완벽하게 지켜질 것이다. 현실이 환상에 겹쳐질 때, 현실이 환상을 조각낼 때, 미리암도 루이즈도 그 상태를 소화할 수 없다. 루이즈는 겨울처럼 춥고 죽음이 자꾸 생각나고 땀에 젖은 뒤처럼 추운 느낌이 들고 몸에 이상한 얼룩까지 솟는다. 그 불안 한 가운데서 미리암은 냉담하게 남아있고, 루이즈는 침묵한다.
그리고 쫓겨나게 될 루이즈가 느낀 건 자기가 돌본 자기의 아이들이라고 믿었던,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아이들과의 끔찍한 괴리다. 아이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자들이므로 루이즈의 충격 따윈 안중에 없다. 그토록 완전히 자기 자신 같던 아이들이었는데. 남의 아이였기 때문에 더 완벽히 나의 아이일 수 있었던 그런 아이들이었는데. 루이즈는 더 이상 사랑할 능력이 없다고 느낀다. 사랑할 능력이 소진되었다고. 더 이상 그들을 다룰 수 없다고. 이럴 때의 루이즈는 초반부의 미리암 같다. 불안을 느끼는 존재. 무엇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느낌, 동시에 아이를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여자.
이 소설에는 양육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진실만 통과할 수 있는 엄격한 문이 장착된 것처럼 보인다. 모성이 정말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이뤄진 걸까. 아니면 종족보존을 위해 희생을 담당하는 여성이 희생이라고 느끼지 않게 하는 사회적 세뇌에 의한 것인지, 양육 과정 속에서의 얼마간의 쾌감과 나르시시즘은 없는 건지, 주체의 불안은 모성의 힘겨움을 수행하기에 지친 베이비시터에게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닌지.
모든 문장이 재밌지만 두 장면이 인상 깊다. 폴과 미리암은 모처럼 맞은 휴가에 루이즈를 따돌리고 어머니 실비가 사는 외떨어진 교외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눈썰매를 타고 아이들을 실컷 놀게 한 뒤 이미 잠든 아이들에게 두 부부가 자장가를 불러준다. 루이즈가 사라진 이 장면은 유일하게도 가족이 온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며, 삐그덕대던 템포가 사라지고 자장가를 듣듯 잠깐 느슨해진다.
밀라가 태어났을 때 가사를 다 외워서 아기 때 내내 두 사람이 함께 불러주던 자장가. 아이들은 눈은 이미 감겼지만 그들은 아이들의 꿈길을 함께 가는 기쁨을 위해 계속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171쪽)
하지만 이 장면은 신기루처럼 희미해지고 만다. 폴과 미리암은 추운 집과 험한 자연이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워서 난방이 잘된 집과 베이비시터 루이즈에게로 얼른 돌아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면은 눈 내린 겨울 공원에서 아이들과 베이비시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분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겨울은 루이즈에게 죽음의 공포 그 자체다. 추운 공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집 없고, 병들고, 늙은 자들이다.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어른들은 스스로 차려입고 따뜻한 안에 있을 것이다. 베이비시터들은 겹겹이 코트를 껴입힌 아이들을 심심함을 달래주려고 공원으로 데리고 나온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겨울에 맞서 생생한 즐거움을 발산하고 베이비시터들은 그 아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