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독서클럽 회원들이 이렇게까지 싫다고 말한 책은 이제까지 없었다. 혐오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누구는 이 책이 지나치게 말이 많다면서 좀 더 경제적으로 썼어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사도 마조히즘적이라고, 누구는 하이틴 로맨스의 성인남성게이버전이라며 이 책을 읽은 뒤 『댈러웨이 부인』으로 해독해야 했다고 했다. 회원들은 자신이 읽은 괜찮은 소설을 소개한 뒤 그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해왔다. 찬반은 어느 책에 대해서나 있었지만 내가 읽자고 했던 『리틀 라이프』시공사, 2016와 관련해서는 나만이 이해 안 되는 열광자였다.
서평을 써야 할 내 차례가 닥쳤을 때야 뒤늦게 이 책을 소개했다. 혼자만 알고 있고 싶을 정도로 놀라운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두터운 흙먼지 아래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석 같은 책이었다. 너무 좋은 책이라 소개하고 싶지 않았다는 괴상한 이유를 대자 클럽 회원들의 기대는 단숨에 높아졌고 (내가 소개한 책들은 지금까지 꽤 괜찮다는 평을 받아온 터라), 곧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회원들 앞에서 책의 무죄성(?)을 변론해야 했다. 회원들은 나를 ‘리틀 라이프의 학부형’이라고도 놀렸는데, 그러자 그냥 무작정 좋기만 했던 아이의 장점을 굳이 설명해야 하는 엄마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들은 뉴요커 네 명이다. 이들이 변화 발전하고 또 망가지는 평생에 대한 이야기다. 배우를 꿈꾸는 윌럼, 건축가가 되려는 맬컴, 무명 화가 제이비, 법학 전공자인 주드. 이 네 명은 대학시절 기숙사의 한 방을 함께 썼던 단짝들이다. 넷은 뉴욕의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민자 가족 출신이면서 맨해튼에서 살게 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종과 계급에서 같기도 하고 아주 다르기도 하다. 맬컴과 제이비는 흑인이다. 맬컴은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사는 부르주아이고, 제이비는 아이티에서 넘어온 교수인 홀어머니하에서 자란 중산층 가정 출신의 화가(지망생)이다. 윌럼은 아이슬란드인과 덴마크인 부모를 둔 미 서부 목장 일꾼의 자식이고, 주드는 고아이다. 책은 이십 대 후반이 된 이 네 명 중 진짜 주인공인 주드와 윌럼이 맨해튼 차이나타운에서 허름한 아파트를 얻는 것에서 시작한다.
뉴욕 시티, 특히 중심 섬인 맨해튼은 살인적 물가와 집세로 악명 높다. 현대예술에 거대자본이 집중투자되는 뉴욕이 대표하는 것은 퍼포먼스와 설치 등 현대미술, 그림, 연극, 영화, 로프트 아파트인데 네 명은 모두 이 분야의 중심에 있고 싶은 남자들이다. 가진 돈은 아직 없지만 취향이 하늘을 찌르고, 현대예술의 창조자이자 향유자이고, 섹스에서 자유로운 이 친구들은 미국인이 아니라 ‘뉴요커’이므로, 인종과 성적 취향, 성정체성에 대해 거의 자유롭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드만 빼고.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지 6년이 지나자, 인종의 자기규정성은 점점 그 힘을 잃는 것 같았고, 여전히 인종을 정체성의 핵심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은 젊은 시절 환상에 매달린 것처럼 어쩐지 유치하고 슬쩍 딱해 보였다.” (96쪽, 맬컴 부분)
주드만 다르다. 대학 시절 이전에 주드가 어디서 자랐고 무엇을 했는지 친구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주드는 미스터리하다. 초반부는 서로 다른 네 명의 캐릭터와,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들의 공통된 불안을 여러 예술작품들에 대한 지식조합형 서술에 유머를 섞어 수다스럽게 보여준다. 미드미국 드라마의 조상격인 『프렌즈』나 『섹스 앤 더 시티』의 남성버전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곧 이 소설이 주드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이자, 반복적인 자해 충동에 대한 드라마라는 걸 알게 되면서 디킨스식의 비극적인 고전적 톤이 끼어든다.
포스트모던한 톤과 고전적인 또 다른 톤은 주드의 자해 공간, 몸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 이 소설은 기존 소설과는 다르게 기억을 불러내는 듯한 주문 같은 서술 방식 때문에라도 자기 몸의 상처를 전시하는 퍼포먼스나 설치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프랑스의 페미니즘 예술가 올란Orlan이 성형을 해 자기 얼굴과 신체에 변형을 가하는 퍼포먼스나, 절단된 신체들이 마치 미래 패션처럼 보이는 영화 『매드맥스』2015나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사진들처럼.
여하튼, 중요한 건 주드이고 주드의 자해 지속사다. 그 자해가 시작되게 된 계기와 폭력의 지긋지긋한 경험이다. 주드가 당한 극단적인 유소년기의 폭력 표현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수위가 높다. 어떤 범죄 미드나 의학 미드보다 더 잔인하고 세밀화 같고 노출적인데, 감각적인 문장과 심리서술이 한데 붙어 극단적인 슬픔이 노출을 감싼다. 한 겹의 베일 아래로 어른거리는 듯 이상하게 모호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게 되는 수도원 성폭력 부분이라든가 루크 수사를 아버지로 알고 탈출해 더 큰 폭력에 처하는 1권의 마지막 절정 부분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다.
이 소설의 큰 장점은 놀랄 만치 집요한 심리서술에 있다. 특히 그 애매한 양가감정에 대한 자기 분석. 주드의 양가감정에 대해 설명은 자의식에 가득 찬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분석하는 것과 같다. 주드는 수도원 앞에 버려진 기원을 모르는 고아이지만 네 친구 중 가장 지적이며, 완벽주의자 변호사이고, 수학과 요리, 노래까지 잘하며,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자연에 대한 사랑과 예술에 대한 심미안이 있고, 신비한 푸른 눈의 이국적 얼굴을 가지고 있는 팔방미인격의 동화 속 영웅 같은 인물이다. 그렇게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사람인 주드가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잔인한 성폭력을 십오 년간에 걸쳐 당했던 과거가 있을 때 자의식이 클수록, 나르시시스트일수록, 자기에 대한 기대치가 높을수록, 모든 것이 유능한 사람일수록 실패에 관련한 온갖 것들을 분석하려고 하고, 그 기억을 계속해서 되돌려 어떻게든 분석하고 정화시키려고 애씀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억 속에 영원히 붙잡혀있게 된다.
주드는 흔히 아주 어린 시절 이상적 자아가 될 부모라 생각하는 그 첫 번째 타자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서, 동일시할 수 있는 기본적 정체성을 박탈당해 영원히 부유하는 자다. 그래서 주드는 유능한 변호사가 돼 돈을 많이 벌고 원하던 대형 로프트에서 어떤 부족함도 없이 살게 되어도 끊임없이 가장 기본 밑천이라 할 수 있는 안정된 관계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면서 그 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연인이나 친구, 양아버지 속에서 이상적 자아인 부모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매면서도 한편으로 자기를 조종하고 농락하고 성적으로 유린할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부모-타자가 아닌지 의심한다. 아버지 찾기이자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이 두 가지 양가감정이 주드 감정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두 감정이 서로에게 지려고 하지 않을 때 면도날이 주드의 팔을 긋는다.
자기를 누군가가 극진히 사랑해주길 바라면서도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멀리하고, 한편 자기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존재란 결핍을 견딜 수 없어서 자기의 나약한 몸을 칼로 그어 스스로 조절력을 획득해 긴장을 완화시키는 주드를 볼 때, 주드가 상상력을 발휘해 왜 자신의 다른 면을 보지 못하는지 궁금해진다. 그것이 작가가 기획한 어린아이의 상처받은 나르시시즘의 인물화라면, 그 허약하지만 완성하려고 하는 집요한 욕구로 버티고 있는 나르시시즘이 완전히 깨져서 돌처럼 변하는 지점을 책의 후반부에서 독자로서 기대하게 된다.
아쉽게도 첫 권에서 619쪽에 달하는 많은 페이지들이 줄어드는 게 두려울 정도로 재밌었다면, 주드가 윌럼과 연인관계를 시작하는 2권에서부터는 긴장이 떨어진다. 주드가 유명배우가 된 가장 사랑하는 친구 윌럼과 함께 드디어 연인으로 살게 되었을 때 앞에 큰 분량으로 나왔던 지긋지긋한 가족 서사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다른 관계인 게이 서사, 아니면 대안가족이라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윌럼은 주드와의 관계를 공표함으로써 배우 명성에 타격이 될 거라는 매니저의 우려에 반박한다.
“나는 내가 게이라고는 별로 생각 안 하는데.”
“남자 놈 걸 건드리는 순간, 넌 게이인 거야.” (2권 72쪽)
“나는 남자와 사귀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는 그 말이 말도 안 되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전 주드와 사귀고 있는 거예요.” (2권 139쪽, 맥스와의 대화)
주드는 윌럼이라서, 윌럼은 주드라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웃기게도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에이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오직 그것이기 때문에, 즉 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둘도 없는 그것이기 때문에, 동일화된 상이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게이의 정치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며 어린아이의 환상적 나르시시즘이나 오히려 이성애적인 낭만적 로맨스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해서 윌럼과의 관계에서 다시 주드가 자해를 시작하는 건 착한 타자인 윌럼과의 차이를 인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옛 기억을 소환시키는 섹스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즉, 진짜 맺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부족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잘못 때문이다. 윌럼과 주드는 스스로에게 이상적인 상, 서로에게 동일시되는 이미지이며,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서로의 차이나 견딜 수 없는 상대방의 이상한 충동 같은 게 아니라 윌럼의 죽음이다.
이 소설에서 잘나가는 예술가가 된 제이비를 빼고는 관련된 사람들 거의 모두가 죽는다. 임성한의 드라마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이 도처에 넘쳐난다. 그것은 그들의 행복이 어떠한 외부도 용납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한 완벽한 가족이자 거울상이 되는 닫힌 세계 속에서의 행복이기 때문인 것 같다. 오직 제이비만 서사에서 살아남는 건, 제이비야말로 네 명 중 가장 끔찍한 인물이어서인 것 같다. 자의식을 가지기보다는 남에게 폐 끼치길 좋아하고, 자기만 알고, 사랑을 대책 없이 갈구함을 숨기지 않고, 명랑하고 뚝심 있고, 섬세할 것 같아도 멘탈이 강하고, 야심만만하며 꾸준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제이비. 화가 제이비는 주드와 윌럼, 맬컴을 자기 그림의 소재로 쓰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의 바깥에 존재하게 된다. 작가의 분신처럼. 제이비는 ‘살아있는’ 실제 작가들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진 유일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여전히 주드에게 가장 가깝고 그의 편을 든다는 생각이 마지막까지 드는데, 마지막에서는 주드에게 좀 더 거리를 둔 선택을 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주드는 영웅이나 예수가 아니라 소설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건 제이비가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생이었던 주드의 드라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