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지역을 급습한 이후 이스라엘은 잔혹한 보복 공격을 팔레스타인에 퍼부었다. 거슬러 올라가 1948년 팔레스타인의 ‘나크바Nakba’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강제 추방되어 난민이 된 역사적 비극을 뜻하는 아랍어에서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가자 지구의 참혹한 현실과 비통한 상황이 초래되기까지, 원인 제공자였던 1세계는 무책임하고 무감각하다. 국제법, 인권, 휴머니즘 따위는 개나 물어가라는 태도로 군림하는 세계의 불한당 트럼프는 가자 지구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휴양지로 만들자는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런 폭력적인 발언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은 치욕을 견디는 것 말고는 ‘속수무책’으로 보인다.
‘속수무책’이란 말 자체가 사력을 다해 살아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동정하면서 무력하고 수동적인 피해자로 단순화하는 방관자의 오만임을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을 통해 배우고 있다. 서구의 시선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은 역사의 희생양이거나 아니면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로 도식화되어 왔다. 70년 동안 생사를 오가는 극한상황에서 버티어내는 것이 그들의 정치적 투쟁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생소한 팔레스타인 번역가인 알라 알카이시의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무지가 주는 편안함을 아마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될 것 같다.
팔레스타인에 관해 여태껏 내가 읽었던 유일한 책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마지막 하늘 이후』였다.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유명한 시 구절 “마지막 하늘 이후에 새들은 어디로 날아야 하는가”에서 가져온 『마지막 하늘 이후』는 1986년에 출판되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라 알카이시의 에세이에 따르면, 가자의 아이들은 봉쇄된 도시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자유로운 새가 아니라 공습 드론을 떠올린다. 가자 지구에 살고 있는 번역작가라면 이처럼 극한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번역가 스스로 “전쟁의 압도적인 무게 아래 언어가 부서질 때, 우리는 계속해나갈 말들을—혹은 힘을—어떻게 찾아내야 할까?(170)”라는 질문을 던지고, 응답하려는 것이 이 책의 전체 의도인 셈이다.
모든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고 망가져 재난 경제에 의존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서 ‘정상적인’ 일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강제 추방되어 폐허가 된 고향이나마 귀향하지 못한 그들에게는 난민 텐트가 집이다. 굶주림이 지배하는 곳에서 그들은 국제구호물품으로 간신히 연명한다. 물도 전기도 생필품도 끊겼다. SNS에 긴 글을 올리는 것은 사치다. 그런 기기 사용마저 파손되지 않은 태양광 패널을 가진 청년들이 유료로 배터리 충전을 해주어야 가능하다. 「축소되는 언어, 폭발하는 기억」에서 알카이시는 그들에게 말줄임은 생존의 문제라고 말한다. 친구와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려 해도 길게 쓸 수가 없다. 거두절미하고 물음표 하나로 생사를 확인한다. 언어에서 문법은 무시되고 사유는 벗겨지고 말의 뼈만 남는다. 줄어들고 줄어드는 언어와 마주하면서 알라 알카이시는 가능한 긴 문장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번역가로서 자신의 윤리적 책무 중 하나가 말이 줄어들수록 기억은 폭발할 수 있도록 기록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면 골칫거리로 받아들이는 세계를 향해 그녀가 글을 쓴다고 하여 과연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들의 고통을 누가 듣고자 할까? 언어마저 망명한 곳에서 어떻게든 읽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어는 적의 언어인데, 아랍어를 모르는 이방인들과 달리 소통할 방법은 있는가? 주인의 연장으로 주인의 사유를 해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이것이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역설이자 이중 구속이다. 끔찍한 현실을 충실하게 번역하면 읽히지 않을 것이고, 현실을 완화해 번역하면 전달하려는 의도를 배신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럴 경우 그들의 삶이 예술로 소비되거나 편안한 삶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번역의 불가능성 앞에서 알라 알카이시는 자기가 한 말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반향실이 아니라 반향실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들어주리라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한다.
알라 알카이시가 주목한 가산 카나피니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는 세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세 사람은 물탱크 운반 트럭에 숨어서 국경을 넘고자 했다. 운전자와 함께 트럭에 타고 가다가 국경 검문소에 도달하기 직전, 세 사람은 빈 물탱크 속에 숨었다. 운전자는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있으라’고 그들에게 명령했다. 쿠웨이트 측 검문관이 허접한 잡담을 하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사막의 태양은 불타오르고 물탱크 내부는 순간식에 화덕처럼 달아올랐다. 간신히 검문소를 빠져나온 운전자가 물탱크 뚜껑을 열었을 때 세 사람은 이미 숨진 뒤였다. 트럭 운전사는 시신의 주머니에서 돈만 빼내고 시신을 버리고 떠나면서 하늘을 향해 “왜 벽을 두드리지 않았어, 왜 소리치지 않았어?”라고 울부짖는다.
그들이 물탱크 벽을 두드리지 않았을까, 라고 알라 알카이시는 반문한다. 손이 부러지도록 두드려도, 물탱크 벽에 피가 흘러내릴 때까지 두드려도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세계는 그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무능한 운전자는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치적으로 거세된 아랍 지도자들은 난민들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는 운전자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 작가들이 목숨 걸고 글을 쓴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작가 가산 카나피니는 이스라엘 모사드에 의해 암살되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접한다. 파티마 하수나는 ‘내가 죽게 된다면 소란스러운 죽음이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사진 작업인 『소란스런 죽음』은 죽어간 이들이 단지 사망자 숫자가 아닌 고유한 이름, 삶, 목소리를 가졌던 존재임을 세상에 각인시키려고 했다. 2025년 칸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이란 감독인 세피데 파르시의 「너의 손에 영혼을 얹고 걸어라」가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하수나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정작 하수나는 자신에 관한 다큐를 보지 못했다. 2025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가족들과 함께 폭사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소망대로 소란한 죽음이 되었을까? 아니면 예술로 소비되었을까? 그녀에 관한 다큐는 개개인에게 얼굴과 목소리를 진정성 있게 부여해주었다는 호평을 영화제에서 받았다고 한다.
알라 알카이시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가자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에서 사이드에게서 대위법적 읽기를 배우고, 자신의 글 「대위법적 신체」에 그의 이론을 적용한다. 번역가로서 그녀는 팔레스타인을 식민화한 제국의 교묘한 언어 사용과 서구중심적 시각을 비판할 수 있는 탈식민적 읽기의 사례로 에드워드 사이드를 차용한다. 사이드가 말하는 대위법적 읽기는 서구 문명이 일방적으로 전경화한 주제 선율 아래 배경음으로 유지되는 피식민지의 부제 선율을 동시에 듣는 비평 방식이다. 사이드의 대위법적 읽기로 잘 알려진 분석 사례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맨스필드 파크』다. ‘대영제국’은 제인 오스틴을 위대한 영문학의 전통으로 자랑해왔지만, 그녀의 소설 전면에 나타나는 영국 귀족 가문의 품위와 고상함, 도덕적 태도는 후경으로 존재하는 ‘식민지 안티구아 노예 농장’에서의 수탈 경제와 수익 덕분에 유지되는 것이라고 사이드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이드는 마지막 저서인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에서 예술가들이 말년에 이르러 대체로 기존질서와 화해하고 타협하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화해를 마치 예술가의 완성된 경지로 추앙하는 것에 그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경계에 선 지식인’으로서 사이드의 대위법적 읽기와 ‘말년성’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양자 모두 체제와의 조화나 통합에 저항하는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공통점이 있다. 사이드에게 경계에 선 지식인이란 주류 사회에 안주하며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귀향하지 못하는 이주민이자 경계인으로 말년까지 날카로운 시각을 잃지 않고 떠도는 자들을 의미한다.
알라가 이 책을 헌정한 시인, 작가, 영문학 교수, 인권운동가였던 리파트 알아리르는 「내가 죽어야 한다면」이라는 시에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 희망을 낳기를 / 이야기로 남기를” 하고 노래했다. 도처에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글쓰기는 증언이고 인간의 어떤 경험보다 오래 살아남은 기억”이라고 알아리르는 말했다. 그의 말처럼 알라 알카이시는 2023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그를 기억하고 애도한다. 알아리르는 죽음을 넘어 타인의 기억 속에 이야기로 살아남는다.
이제 알라 알카이시는 아일랜드로 망명하여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경계인으로서 살고 있다. 그녀의 몸은 더블린의 서늘한 거리를 걷고 있지만 열기 가득한 가자에서의 근육 기억을 동시에 실어 나르는 ‘대위법적인 신체’이기를 원한다.
번역가는 단지 언어를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소멸되어 가는 자신들의 세계를 증언해야 한다고 믿는 그녀에게, 사라지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자기 배신이다. 번역가로서 그녀는 자신들의 삶을 역사의 증언으로 만들고,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자 한다. 경계에 서 있는 번역가로서 그녀는 오래 살아남아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고 기억하고 증언할 것으로 보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