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요즘은 부고를 자주 접하게 된다. 부쩍 늘어난 부고에 오래 잊고 지냈던 지인들에게 불현듯 안부를 묻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일본 화가 온 카와라河原温, On Kawara처럼 “나는 아직 살아 있어요”라고 전하면서.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는 대학 동창이었고 한때는 같은 출판사 동료였지만 오랜 세월 소식이 끊어져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옛 절친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누네즈의 또 다른 소설 『친구』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독자들은 우리의 삶에서 친구란 무엇인가, 사랑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대면하게 된다.
첫 장에서 옛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나’는 우연히 옛 애인의 강연을 듣게 된다. 교수이자 작가이기도 한 전 애인은 1세계의 지구적 자원 착취, 채굴 자본주의, 바이오테러리즘, 대량학살무기 등등이 다양한 종들을 멸종시키고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강연의 마지막에 이르러 희망 없는 미래에 아이를 던져놓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라고 역설한다. 그런 만큼 며느리가 셋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에 축하는커녕 절망한다. 그 바람에 아들 내외와 척지고 지내는 인물이다. 그는 저출생의 시대에 힘닿는 대로 많은 아이를 낳아야 인류의 미래가 유지될 것이라는 헛소리에 분노하는 냉소적 지식인이다.
그의 주장은 천적이 없어진 인간들이 종다양성과 에코시스템을 파괴시킨 대가로 “고독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에드워드 윌슨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윌슨의 고독세eremocene는 그리스 어원인 eremos고독한+cene지질학적인 시대, 世의 합성어다. 고독세는 다른 종들을 멸종시킨 뒤 인간종만이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에 대한 경종이다. 인간의 처분에 맡겨진 비인간 동물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설핏 목이 멨던 그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종의 번식을 억제하는 것이야말로 지구 행성의 원활한 신진대사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첫 장에서부터 거시적 차원의 생태계 파괴, 기후위기 등을 강조한 다음, 뒤따라오는 장들에서는 사적 차원에서 노화, 자살, 살인, 죽음에 관한 서사들이 일화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작가이자 동성애자인 리턴 스트레이치를 17년 동안 사랑한 화가 도라 캐링턴이 이런 일화 중 하나에 해당한다. 캐링턴은 후일 그녀의 남편을 사랑한 스트레이치마저 받아들여, 세 사람은 함께 살았다. 그러다 스트레이치가 위암으로 죽자 그녀도 뒤따라 자살한다. D. H. 로렌스는 『사랑에 빠진 여인들』에서 도라 캐링턴을 화가 축에도 끼지 못하는 변태적인 화가의 모델로 희화화한다. 영문과 교수로서 누네즈가 잘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처럼 느슨하고 산만하게 뿌려져 있는데, 왜 이런 소설적 전개를 선택했는지는 마지막에 이르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게 된다.
화자가 두 번째 찾아갔을 때, 친구는 암이 전이되었고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녀는 연명 치료가 아니라 “잘 죽기”를 선택한다. 그녀에게 잘 죽기는 “침착하게 약간의 품위를 지키며” “깔끔하고 산뜻하게” 죽는 것이다. 친구는 마지막에 “내게 필요한 건 나와 함께 있어 줄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기편이 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친구는 행복하게 살 권리뿐만 아니라 잘 죽을 권리도 주장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친구의 선택에 설득이 되기보다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죽음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면서 자율적인 인간으로서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한 친구가 절친에게 어떻게 조력자살의 부담을 떠넘길 수 있는가? 「다 잘된 거야」라는 프랑스 영화에서처럼, 부유한 친구가 스위스에 가서 합법적인 존엄사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자신이 결단을 내리기까지 자기 곁에 있어 달라는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화자는 받아들인다. 자살을 범죄시하는 사회에서 그런 행위는 자살방조죄에 해당한다. 고독사가 예견된 독자로서 나는 화자인 ‘나’의 결단과 마주하면서, 인위적 임종을 앞두고 한 달 정도 내 곁에서 재밌게 보내줄 친구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라는 심란한 생각들이 오락가락했다.
그런데 “품위 있게” 죽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누구나 죽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죽음이 평등한 것은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려 쌓이는 눈송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품위 있는” 죽음의 선택이야말로 ‘귀족적인’ 친구의 계급적 정동일 수도 있다. 장애 당사자 작가인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에서는 그룹홈의 침대에 평생 누워 지내면서 요양보호사에게 똥오줌 처리마저 의존해야 하는 옆방 여자를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장애인을 본다면 세상 사람들은 “나라면 절대 못 견뎌.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거야”라고 말하겠지만, 당당히 살아내는 옆방 여자에게서 작가는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찾는다. 여기서 친구의 선택은 바로 그런 세상 사람들의 입장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고통으로 인간적 품위를 상실하는 수모를 견디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죽어주겠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친구의 아름답고 ‘품위 있는’ 결단이 행여 우생학적인 정치로 이용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박한 부탁에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친구의 가장 고독한 여행에 나는 동반자가 되어준다. 친구의 부탁을 일단 수락하지만, ‘나’는 이 상황에 숨이 막혀 지레 죽을 것만 같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고 과연 제정신으로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을까? ‘나’는 친구의 죽음을 나의 죽음에 대한 리허설로, 친구가 처한 상황이었더라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기에 이른다. 그런 설득 과정을 작가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인간혐오 범죄자들, 옆집 할머니, 유기묘의 시선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무거운 주제가 주는 중압과 긴장감에 독자가 함몰되지 않도록 작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코믹 릴리프처럼 삽입시켜 놓는다.
첫 장면에서 강연으로 만났던 전 애인을 ‘나’는 마지막에 이르러 직접 만난다. 어쩌면 그가 ‘나’의 결정을 흔쾌히 지지하고 응원해 줄 것으로 믿었을 수도 있다. 자기 신념과는 달리 전 애인은 나의 결심에 반대한다. 그는 친구의 선택과 나의 결단을 공유 정신병folie deux이라면서 힐난한다. 공유 정신병이란 친밀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지나친 공감에 감응되어 병이 악화되는 것을 뜻한다. 두 사람이 경찰의 심문에 대비하여 알리바이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심문의 순간 ‘나’의 거짓말은 너무 쉽게 들통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경찰독자이 납득할 만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작가로서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는 공원 벤치에 넋 놓고 앉아서 친구가 에드워드 호퍼의 「케이프 코드 아침」처럼 발코니에 서서 저 멀리 응시하는 풍경을 올려다본다. ‘나’는 정신 나간 늙은 여자처럼 울면서 아이스크림을 삼킨다. 내 곁에는 식료품 봉투가 놓여 있다. “친구는 절대 먹지 않을 계란, 빵, 연어, 케일, 아이스크림. 그것들을 나는 먹고 또 먹고 배가 불러 더는 먹지 못할 때까지 먹을 것이다. 그러고도 더 먹을 것이다.”(248쪽). 작별연습이 주는 고통을 애써 억누르다가 폭식으로 폭발하는 이 장면에 이르면 그동안 에둘러왔던 온갖 이야기들이 주체할 수 없는 온갖 격렬한 감정들의 블랙홀로 수렴된다. 친구에 대한 절망적인 사랑의 감정은 공유 정신병처럼 독자들 또한 감염시킨다. “독자들이 소설로 이끌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기로 떨리는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덥히고 싶은 마음”때문이라고 베냐민은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 일어나서 가야겠다.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을 거야… 그런데 머리가 어지럽네. 일어서면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 같아. 공황 상태에 빠진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공포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곧 끝날 거야. 이 동화 같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장 슬픈 이 시간은 지나갈 거야. 그러면 혼자가 되겠지.”(251쪽)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거울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듯, 다른 세계로 떠나는 친구에게 그곳에선 어떻게 지내요, 라고 묻는 것으로 나는 친구와 작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시몬 베유는 말한 바 있다. 그것이 의미한 바는 힘들고 수상쩍은 시간을 당신은 잘 견디고 계신가요, 라는 안부가 아니었을까? 베유처럼 다정한 말 한마디가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뭉그적거리면서 오랫동안 묻지 않았던 친구에게 안부를 다시 전한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