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6일 파리 올림픽 개막식 공연을 보면서 프랑스가 프랑스하네, 싶었다. 서구 근대 탄생설화의 핵심은 자유, 평등, 박애다. 혁명의 폭죽이 터지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린 목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춤춘다. 왕이 참수된 시대, 만인은 자유롭고 평등할 것이다. 최근의 래디컬한 퀴어 이론을 ‘저급하게’ ― J. 핼버스탬의 어휘 ― 연출한 ‘최후의 만찬’에서는 벌거벗은 디오니소스, 드랙퀸, 다이크, 트랜스, 젠더 퀴어 사도들이 모여앉아 흥청거린다. 개막식 공연은 어떤 성적 정체성이든 상관없이 만인은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의 주체임을 보여준 유쾌한 축제였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최근에 번역된 매기 넬슨의 『아르고호의 선원들』이 떠올랐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고호 선원들은 황금 양털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영웅 이아손과 그 일행을 뜻한다. 넬슨은 이 제목을 영웅 서사가 아니라 퀴어 서사를 위해 롤랑 바르트에서 차용한다. 넬슨의 텍스트는 이론을 씨줄 삼고 자기 경험을 날줄로 하여 느슨하게 엮어 짠 일종의 오토픽션autofiction이다. 텍스트 안에 병치되어 있는 수많은 철학자, 작가, 예술가들은 자기 경험의 차경借景: 외부의 풍경을 내부의 풍경으로 끌어들여 활용하는 건축기법으로 활용된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서 바르트는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을 “아르고호의 선원과도 같은 것”으로 비유한다. 바다를 오래 항해한 선박에는 혹등고래의 등처럼 온갖 것들이 달라붙는다. 이물질은 긁어내고, 선박의 낡은 부품들은 교체되고 파손된 부분은 수리된다. 더 이상 예전의 선박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새로 만들어 가면서도 선원들은 여전히 아르고호라는 이름으로 항해한다. 만약 당신의 연인이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아르고호의 선원들처럼 날마다 새롭게 갱신하고 보수하면서 사랑을 지속한다는 뜻이다. 넬슨은 그것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의 과제이자 언어의 과제”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사랑의 형태학이야말로 이 텍스트 전체에 흐르고 있는 넬슨 자신의 너에 대한 사랑의 단상이기도 하다.
날마다 갱신되는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너는 경계지대에서 서성이는 존재다. 한때 너는 나의 ‘남편’이었고 부치였지만 지금은 전환 수술을 받고 트랜스 남성처럼 변신하고 있다. 너는 지정 성별인 여성을 원하지도 않지만, 유방을 제거하고 탑수술을 받았다고 하여 남성 젠더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너는 언제나 되기의 과정 중이다. 너의 몸은 끊임없이 횡단하면서 환승한다. 바깥사람들은 너를 아름답고 세련된 여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혹은 의붓아들을 데리고 식당에 가면 너와 나는 다정한 남편과 아내로 대접받는다. 이처럼 너를 지칭할 마땅한 대명사가 없다. 그것을 만드는 것이 나의 ‘사랑의 과제이자 언어적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너와 딱히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2008년 동성결혼방지법에 대한 주민발의안이 통과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LA에서 결혼할 수 있는 곳을 구글신에게 의지하여 황급히 검색한다. 너와 나는 캘리포니아주 노워크 시청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제인 에어의 유명한 구절처럼 “독자여, 우리는 결혼했다”에 이른다. 결혼뿐만 아니라 나는 아이까지 절실히 원한다.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모성까지 원한다면 “무슨 퀴어가 이래”라는 비난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네가 데려온 의붓아들도 내가 키운다. 아이를 ‘배태’하기까지 나는 여러 번 유산을 경험한다. 매번 정자를 공여 받아서 인공수정을 하지만 여러 번 실패한다. 그럴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왜 아이가 낳고 싶냐고 묻는다면 딱히 변명할 말도 없다. 퀴어들의 입장에서 이런 소망은 다소 실망스럽다. 아이가 우리의 미래라는 통념에 비추어볼 때, 퀴어들에게 그런 미래는 없다. 나의 엄마는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족사진을 찍고 그것을 머그잔에 장식하는 연례행사를 한다. 가족사진을 넣어서 만든 머그잔을 보고 한 친구가 “와 내 평생 이렇게 이성애 규범적인 건 처음 봐”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퀴어 친구들에게 이성애 재생산 미래주의에 부역하는 나의 배태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다. 나는 레즈비언 분리주의자들에게도 아이는 주변에 있었다체리 모라가, 오드리 로드, 에이드리언 리치, 캐런 핀치, 푸시 라이어트…고 투덜거린다.
어쨌거나 나는 배태, 모성 등을 퀴어의 정치성으로 재활용하고 싶다. 배태 또한 나와 다른 타자의 씨앗을 품고 키우고 이양한다는 점에서 퀴어한 수행의 한 형태다. 퀴어한 너의 몸이 언제나 변신 중에 있는 것처럼 배태한 나의 몸 또한 끊임없이 변신 중이다. 일상에서 너와 나는 서로의 변신을 목격하면서 늙어가는 두 인간 동물이기도 하다. 넬슨은 모성에 관한 도널드 위니콧의 이론과 자신의 모녀 관계를 사색하기도 한다. 모성은 신성한 숭배의 대상임과 동시에 만병의 근원인 것처럼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래도 엄마 탓 저래도 엄마 탓이다. 사랑과잉 엄마도 문제고 사랑결핍 엄마도 문제다. 넬슨에게 엄마 노릇하기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 위니콧의 엄마노릇 “그만하면 충분하다”였다.
넬슨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오래된 이성애 핵가족 제도를 넘어 ‘새로운 친족 체계’를 구성할 수는 없을 것인지 모색한다. 넬슨 자신의 지도교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퀴어들로부터 다방면에서 공격받았던 퀴어이론가 이브 세지윅은 퀴어를 성적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다종다양한 ‘저항, 균열, 불화’를 의미하고자 했다. 자칭 일탈적이고 ‘뚱뚱한’ 퀴어인 세지윅의 이론에 바탕하여 넬슨은 자신의 비규범적이고 난잡한 친족 이야기들을 중첩시킨다.
‘새로운 친족 체계’를 구성하는 너와 나의 이야기는 세지윅적 의미에서 퀴어적이다. 나의 ‘남편’이었던 너는 태어날 때 이름은 웬디 멀론이었다. 얼마 뒤 입양되면서 너는 레베카 프리실라 바드가 되었다. 너는 대학을 다닐 때까지 레베카라는 이름으로 지냈고 그 이후 해리엇 도지가 되었다. 후일 수소문 끝에 찾아낸 너의 생모는 성노동자였고 레더 다이크였다. 성노동을 해야 할 만한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냐고 네가 묻자 그녀는 단칼에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고 “가진 재산 놀려서 뭐 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너의 생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술꾼이고 폭력적인 제리라는 인물로 그녀는 기억했다. 너에게 생부모는 “실망의 대상도 유전적인 경고의 대상”도 아니었다. 너에게 엄마는 입양모인 필리스였으니까. 이 정도라면 이성애를 조롱하는 새로운 친족 체계를 구성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나는 이기라고 불릴 아이를 분만한다. 나를 변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큰 ‘똥덩어리’가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흔히 여성 인간 종이 재생산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신이 내린 기억 상실에 힘입어 분만의 통증을 잊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여자들이 잊는 것은 통증이 아니라 죽음과 접했다는 사실이다. 엄마가 되기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넬슨은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를 죽음 직전까지 데리고 갔던 아이의 이름이 장차 이기라고 불릴 이가쇼Igasho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키의 언어로 이가쇼는 ‘방랑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미국 백인 두 명이 북아메리카 원주민 이름까지 구태여 차용하고 있다는 것에 독자로서 나는 정치적 올바름까지 챙겨가는 것에 심보가 꼬였다.
어쨌거나 넬슨은 앤 카슨의 ‘신을 위해 중심을 비워 두기’라는 시적 개념처럼 배제되고 주변화된 퀴어의 위치를 탈중심화로 전유하고자 한다. 분재에 익숙한 사람은 식물을 화분의 정중앙에 심지 않는다. 신성함이 깃들 수 있는 중심은 언제나 비워 둔다고 한다. 앤 카슨은 중심의 쓸모를 잃어버리도록 행동하라고 말한다. 그런 앤 카슨을 차용하여, 넬슨은 퀴어의 주변성을 중심을 쓸모없도록 만드는 퀴어공간의 정치학으로 자기이론화한다. 사실 넬슨의 『아르고호의 선원들』은 『블루엣』과는 차이와 다름을 보여주는 새로운 글쓰기다. 나의 입장에서 나를 이야기하는 고백적이고 자전적인 이런 글쓰기를 과연 자기이론이라고 해야 할지, 오토픽션이라고 해야 할지 사실 혼란스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너와 나의 사랑은 퀴어한 비규범적 사랑이다. 너와 나의 관계는 부치/팸, 이성애자 커플, 두 여자 친구 등 규정하기 힘든 관계다. 친밀한 관계에서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아무렴 어떠랴. 그것이 사랑인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