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배고프다고 떼를 쓴다. 바깥으로 나가자고 조른다. 나가면 무섭다고 칭얼거린다. 금방 마음이 변해 집으로 돌아가자고 보챈다. 아이는 언젠가 자기 딸이 누구인지도 몰라볼 것이다. 세상천지에 엄마와 나밖에 없는데, 엄마가 아이가 되면 내가 아이의 엄마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엄마의 마지막 거처는 양로원이 될 것이다. 아이가 된 엄마를 보면서 조만간 늙은 고아가 될 나의 미래에 가끔씩 억장이 무너진다.
추석 연휴에 우연히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불평꾼』현대문학, 2021 속에서 오래 전에 읽었던 『두 늙은 여자』이봄, 2018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유제니디스의 단편 모음집 표제작인 「불평꾼들」에서 좀 덜 늙은 여자 캐시일흔을 바라보는는 좀 더 늙은 여자아흔을 바라보는에게 “델라, 때로는 책이 어떤 이유에선가 우리 삶에 찾아오죠. 참 이상한 일이에요.”라고 말한다. 캐시의 말처럼 늙은 독자인 내 삶에 「불평꾼들」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두 쌍의 늙은 여자들, 「불평꾼들」의 델라와 캐시, 『두 늙은 여자』의 칙디야크와 사. 그들은 또 다른 늙은 불평꾼인 나에게 쓸모없음의 쓸모를 가르쳐주었다.
늙어가면서 책읽기는 어떻게 달라질까? 젊은 시절에는 나이, 성별, 빈부 따위가 감히 나의 책읽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늙은 주인공들과 점점 동일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위 ‘라떼는 말하자면,’ 작중인물과 동일시가 아니라 거리유지를 해야만 작품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신비평적인 문학이론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때였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계급, 인종, 젠더, 나이, 종교, 교육, 직업 등과 무관한 그런 보편성이란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보편적인 것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상황적 지식’을 주장해왔던 페미니즘 이후, 문학작품을 완벽한 건축물로 물신화했던 신비평적 문학이론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지난 해 8월 캐시는 델라와 함께 쇼핑하러 나갔다. 캐시가 물건을 고르는 사이, 델라가 보행기 손잡이를 놓쳐 넘어졌고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다. 캐시는 병원 구내식당에서 델라의 아들들인 베넷과 로비를 기다렸다. 델라의 두 아들은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들처럼 불길한 검은 색 정장차림으로 병원에 나타났다. 캐시가 변명을 한다. “내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델라가 넘어졌어요. “다 내 탓이에요.”(50쪽) 그러자 보험회사에 다니는 장남 베넷은 늙은 어머니가 넘어지는 것도 증상의 일부이고 앞으로도 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므로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양로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 두 아들들의 결론이었다. 델라는 벌써 “여든여덟이고 2년이면 충분할 거예요.”라고 캐시가 설득하지만, 그들은 캐시의 아들들은 아니었다.
캐시는 요양원에 들어간 델라를 방문하려고 눈폭풍이 올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고에도, 남편 클라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출발한다. 델라와 40년 지기인 캐시는 오래 전에 선물했던 책 『두 늙은 여자』의 20주년 기념판을 다시 델라에게 선물로 가져간다. 벨마 월리스의 『두 늙은 여자』는 작가가 어린 시절 들었던 알래스카 인디언 부족의 전설을 다시 쓴 것이었다. 겨울은 다가오고 극심한 기근이 들자 두 늙은 여자 칙디야크와 사는 부족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알래스카에서는 극심한 기근이 들면 입 하나라도 덜려고 무리 중에 양식만 축내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늙은이들을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가는 무리 중에 칙디야크의 딸과 손자도 있었다. 칙디야크에게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다. 칙디야크는 여든 개의 여름을 보았고, 사는 일흔다섯 개의 여름을 보았다. 그 세월 동안 열심히 일했고 살 권리가 있지만 부족원들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노년에 이르러 두 늙은 여자는 늙었다는 핑계를 대면서 오랜 세월 배워왔던 것들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삶에서 자기들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만족할 줄 모르면서 불평하고 대접받기를 원했다. 부족 젊은이들은 기근으로 부족 전체가 다 죽게 생긴 마당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데다 불평꾼인 늙은이들을 버리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사실 두 늙은 여자는 아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이제 아무것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뭔가 해보고 죽자.”라고 사는 결심한다. 젊은 시절 남자 사냥꾼들보다도 탁월한 사냥능력과 도덕적 용기와 생존능력을 지녔던 사. 그녀의 엄마는 ‘하늘의 별’이라는 뜻으로 ‘사Sa’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붙여주었다. 자신이 어쩌다가 이토록 무능하게 되었을까를 반성하면서, 사는 이대로는 못 죽겠다는 오기를 발동시킨다. 사실 두 늙은 여자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혹한에 눈을 파고 들어가서 잠을 청하고 맞이한 아침이면 온몸이 마른 장작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관절을 다시 움직이려면 뼈마디가 삐걱거리고 통증으로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칙디야크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운 삶을 칙디야크는 끝장내고 싶었다. 하지만 칙디야크는 자기가 죽어버리면 홀로 눈 속에 남겨지게 될 사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사는 칙디야크의 손주가 몰래 두고 간 손도끼로 힘들게 사냥을 시작했다. 운도 따라주었다. 사는 다람쥐를 손도끼로 명중시켰다. 부족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토끼가 칙디야크가 쳐놓은 올무에 걸려들었다. 칙디야크는 예전에 자기 부족이 살았던 강변 근처 물고기가 풍성했던 곳을 기억해냈다. 그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썰매를 끌면서 사력을 다해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하여 버림받았던 두 늙은 여자는 혹한을 넘기고 살아남아서 봄을 맞이한다. 여전히 굶주림에 찌들린 채 되돌아온 부족에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지혜를 전수한다.
이 이야기가 21세기 미국에서 살고 있는 늙은 여자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칙디야크와 사는 오래 전 알래스카에서 살았던 여성들이었다. 반면, 캐시와 델라는 사냥을 하고 밧줄을 땋고 바구니를 짜고 눈썰매를 끄는 문화에서 더 이상 살지 않는다. 양로원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델라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늙은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삶의 지혜라는 것이 있을까? 작가 스스로도 그런 질문을 해보았을 것이다. 『처녀들, 자살하다』 『미들섹스』 『결혼이라는 소설』이들 장편은 다음 서평 기회로. 등 무거운 주제를 깊이 있는 유머로 풀었던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자기 어머니가 치매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두 늙은 여자』를 이 단편 속에 녹여 넣었다고 한다. ‘그래, 치매라도 괜찮아.’라는 위로를 전하고 싶은 것처럼.
사실 캐시와 델라가 40년 지기인 것이 독자인 나로서는 처음엔 공감하기 힘들었다. 캐시는 이혼하고 두 아이를 키우고자 동분서주 고군분투하는 삼십대였을 때 델라를 만났다. 그때 델라는 쉰이었고 공화당원인 남편에다 호수가의 멋진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캐시에게 일은 절박한 생계의 문제였지만 델라는 세 아들이 장성하여 독립한 뒤 무료해서 취미삼아 비서 일을 했다. 그 당시 캐시는 델라와 같은 건물의 회계 사무실에서 일했다. 나중에는 살다보니 사는 곳도 너무 멀어지게 되었다. 캐시가 디트로이트에서 살았다면 델라는 직장을 그만두고 플로리다로 갔다. 은퇴하고 부동산 사업을 하겠다는 남편을 따라 여기저기로 옮겨 다녔다. 델라가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 딕을 따라 이동하는 것에 캐시가 한 마디 했다.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면서 델라는 뉴햄프셔 주 콘투쿡으로 되돌아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묶어 준 것은 책이었다. 단지 독서취향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미국 중서부와 동북부에 떨어져 살고 있는 두 여자가 40년 동안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캐시의 두 번째 남편이 의심하면서 툴툴거린 것처럼 두 사람은 레즈비언 관계였을까? 두 사람은 ‘금지된 욕망이 넘쳐흐르는’ 단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고 3인칭 화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레즈비언 관계는 결혼 관계의 반복에 불과하지만, 두 여자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친구 관계라고.
양로원을 방문한 캐시는 감금당한 것 같다는 델라의 푸념에 이제 “손도끼를 사용할 때”라고 속삭인다. 캐시가 보기에 치매에 걸렸고 쇠약해진 델라에게 그다지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캐시는 델라를 병원에서 몰래 빼돌려 콘투쿡의 그녀 집으로 향한다. 폭설로 일주일 째 꼼짝없이 델라의 낡은 집에 갇혀버린 두 늙은 여자는 찬장에서 데킬라와 마르가리타 병을 발견한다. 이제 이 겨울을 확실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캐시는 환호한다. 캐시는 친구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스스로 남은 삶을 살 수 있는 ‘손도끼’ 역할을 해준다.
델라의 집에 사람들이 찾아오게 된다. 캐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델라에게 균형운동을 시키는 물리치료사, 방문간호사,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주는 동네 여자 등. 고려장하듯 델라를 양로원으로 보냈던 아들 베넷이 주말에 오고 막내아들 로비도 여자친구와 함께 가끔 드나든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늙은 아이를 보내는데도 온 마을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렇게 한 해가 흐른다. 다시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린다. 델라는 눈 속을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눈 속으로 나가, 그 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이 하이트아웃처럼 온통 하얗다....... 그냥 걸어가는 거야. 계속 가는 거야. 밖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친구를.’(64쪽)
추석연휴에 『불평꾼』을 읽고 있다가 5월에 분명 보았던 KBS 시사기획 「GPS와 리어카: 폐지수집노동 실태보고서」를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폐지수집 노년들을 다룬 다큐였다. 한국사회의 ‘가난의 문법’에서 최하층은 길거리에서 폐지 줍는 노인들이 차지한다. 늙은 여자 김은숙77세은 새벽 다섯 시에 일터로 나온다. 피디PD가 물었다. 이 새벽에 나오시면 무슨 생각이 드시냐고. 김은숙은 세상천지가 내 것처럼 여겨진다면서 웃는다. 그녀는 산더미 같은 폐지들을 실어 나르면서 짐이 가벼우면 몸이 무겁다. 짐이 무거우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가볍다. 거리를 깨끗이 치우면서 그 일로 내가 벌어서 먹고 살지 않느냐고 말했다. 지피에스GPS로 추적한 결과 폐지수집 노인들은 하루 평균 13km를 걸었다. 무거운 리어카를 끌면서 하루 15시간을 이동한다. 그들의 평균 시급은 이처럼 고물가시대에 1,000원이 되지 않는다. 2022년 최저임금 9,160원의 10분의 1수준에 불과했다. 그들의 고단한 삶에서 칙디야크와 사가 눈밭에 썰매를 끌고 가는 모습이 겹쳐졌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폐지수집 노인이 아니라 자원재활용 운동가들이다. 가난한 노인들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미화하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정부에게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김은숙은 현대판 고려장을 당한 노년이라고 해도 칙디야크와 사처럼 뭔가 내 손으로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겠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의 수레에 실린 재활용자원만큼이나 거리를 빛나게 만드는 삶 자체가 연민, 혐오, 경멸이 아니라 존중되었으면 한다. 델라처럼 거리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