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가 가능할까? 한 번뿐인 인생에서 두 번 ‘다시’는 불가능하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처럼 우리에게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비스와바 심보르카, 「두 번은 없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다시’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올리브 키터리지』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2010의 후속편으로 나온 『다시, 올리브』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2020에서 ‘다시’의 가능성과 만났다.
덩치 크고 심퉁 맞고 훈장질에 익숙하지만 ‘츤데레’의 면모를 지닌 올리브 키터리지는 어느덧 칠십 대에서 팔십 대로 접어든다. 그곳 크로스비 사람들은 다시 결혼하고, 다시 헤어진다.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 올리브의 시선에 포착된 다양한 인물군은 제각기 세월의 무게를 견디면서 천태만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살아온 세월만큼 축적된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주변의 ‘멍청이들’과는 다르다고 올리브는 여전히 자신한다.
학생들에게 엄격하고 무서운 수학 교사로 평생을 보낸 올리브는 자신의 뜻에 맞서는 사람과 마주친 적이 거의 없다. 그런 그녀에게 아들은 ‘심장의 바늘’이다.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낸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그녀는 다정한 적이 없었지만,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들을 염려하고 사랑했다. 그녀는 아들이 족부 전문의로 개업하고 손자만손녀가 아니라 다섯을 낳고 살면서 자기 가까이 머무르길 원했다.
크리스토퍼는 올리브의 기대를 여지없이 박살 냈다. 그는 의학박사이자 철학박사인 수전 번스타인과 후다닥 결혼하고는 미련 없이 고향집을 떠나버렸다. 끔찍한 엄마 곁을 한시바삐 떠나고 싶었던 것처럼. 올리브는 세련되고 똑똑한 상류층 며느리를 결코 좋아할 수가 없다. 아들을 빼앗아갔으면 잘 살기나 할 것이지, 못된 년이 1년 만에 아들을 차버리다니. 올리브는 속이 부글거린다. 아들의 두 번째 아내는 어떤가. 수전과는 반대로 멍청하고 의존적이다. 각기 씨가 다른 자식을 두 명이나 데려온 주제에 다시 아이를 낳고 또 낳겠다면서 아들의 등골을 휘게 만든다. 그러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다.
『다시, 올리브』에서 올리브는 불구의 시간을 살고 있다. 삶의 시간이 불구이지 않던 적이 있었던가! 심장은 고장 나서 스탠트 시술을 받았고, 거구를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전남편 헨리의 사후, 그녀는 하버드맨이었던 잭 케니슨과 놀랍게도 다시 결혼한다. 짝과 사별한 두 사람은 로맨틱 코미디처럼 첫 만남부터 견원지간이다. 서로 꼴 보기조차 싫다면서도 밀당을 한다. 하버드 대학교수로 퇴직한 잭은 평생 대단한 인물로 살아왔다. 하지만 심심산골메인주로 이주한 지금,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시도 때도 없이 새어 나오는 오줌방울과 뛰다 말다를 되풀이하는 낡은 심장만큼이나 퇴물인 꼴통 공화당 지지자일 뿐.
올리브와 잭 두 사람은 자식욕을 할 때는 의기투합하지만, 상대 자식이 자기 자식보다 조금 더 못났다는 사실에서 서로 위안을 얻는다. 잭은 레즈비언인 딸과 의절한 상태고 올리브의 아들은 연락조차 뜸하다. 올리브는 레즈비언 딸과 의절한 잭을 비웃는다. 반면 잭은 진보적인 척하는 올리브의 속물성을 꼬집는다. 올리브는 두 번째 며느리가 데려온 두 아이의 아빠가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내심 용납하지 못한다.
육체적 취약성은 노년끼리 서로 기대게 만든다. 잭은 올리브와 첫 키스하던 순간이 마치 따개비가 등에 잔뜩 달라붙은 거대한 혹등고래와 키스하는 기분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래도 잭은 그 누구도 아닌 올리브이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한다. 이윽고 8년을 함께 살면서 사랑하고 싸웠던 잭마저 죽는다. 올리브는 홀로 남겨진다.
이 산골동네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한때 올리브의 학생이던 앤드리아 르리외가 미국의 계관시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앤드리아는 흥부네 자식들처럼 추레하고 가난한 캐나다계 이민가족의 여덟 자녀 중 막내였다. 올리브의 기억에 앤드리아는 언제나 외톨이였고 외로워 보였다. 앤드리아가 귀향한 것은 아버지 세버린 르리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올리브는 카페에 앉아 있는 앤드리아에게 다가가서 어린 시절의 널 기억한단다, 넌 항상 슬퍼보였다고 말해준다. 마치 어린 시절의 너의 슬픔에서 시인의 싹수를 보았다는 투로.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늘어놓고 “내 이야기를 너의 시에 써먹어도 돼. 맘껏 써.”라고 인심 쓰듯 말하고 자리를 떠난다.
앤드리아 르리외는 올리브의 말을 자신의 시로 ‘다시 올리브’에게 되돌려준다. “삼십사 년 전 내게 수학을 가르쳐준 누군가는/ 나를 겁에 질리게 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침 먹는 자리로 와서 앞에 앉았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채/ 내가 늘 외로움을 탔다고 말했다/ 그 말이 자기 이야기인 줄 모르고.”(341쪽)
올리브는 「미국 시 리뷰」를 쓰레기통에 처박으면서 깨닫는다. 앤드리아가 슬퍼 보이고 외로워 보였던 것은 그애가 가난한 이민가족의 막내이자 특출한 재능이라고는 없어 보였던 여자아이였기 때문이었다고. 가난한 이민가족의 여자아이라면 당연히 불행하고 슬프고 외로워야 한다는 인상은 결국 올리브의 계급적 편견이었던 것이다. 시인의 시선으로 ‘다시, 올리브’를 보면서 그녀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경험한 온갖 이야기를 독자는 얼마나 믿어야 할까? 올리브인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타인의 기억으로 되돌아오는 자신과 마주치지 않는 한. ‘나’라는 존재는 결국 타인의 시선과 뒷담화로 구성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올리브는 편견에 가득 차 있던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편견이 깨지면서 상처 입지만 그런 상처로 생긴 흉터가 또한 치유임을 받아들인다. 『다시, 올리브』에서 그녀는 날마다 죽음의 그림자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노년이다. 그럼에도 올리브는 죽음을 기다리는 정형화된 늙은 노친네가 아니라 그냥 올리브로서 살고 있다. 세 살짜리 손녀도 뗀 오줌 기저귀를 차고서도 한 잔의 커피와 한 조각 케익에 행복해하고 불구화된 삶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복지 아파트에서 만난 친구 이저벨과 서로 생사 안부도 확인하면서.
심보르스카를 다시 인용하자면, ‘다시, 올리브’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 같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