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혼자 읽는 것과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읽는 것은 다르다. 혼자 읽기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거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함께 읽기는 삶에 우애를 불러오고 공동의 추구를 형성한다. 오랫동안 책을 함께 읽는 것은 결국 삶을 같이하는 일이다. 책으로 자신을 바꾸고, 가족을 바꾸고, 지역을 바꾸는 아름다운 혁명이다. 함께 읽기로 생각하는 시민을 만들어가는 전국의 독서공동체들을 시리즈 ‘책, 공동체를 꿈꾸다’에서 격주로 소개한다. 책읽기 문화와 독서공동체 확산을 위한 한국일보와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공동 캠페인의 일환이다.
창원은 아무래도 낯설다. 선친이 마지막으로 직장을 다녔던 곳이지만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창원이라고 소리 내면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없이 늘어선 공장들이다.
2010년 마산, 창원, 진해가 합쳐서 창원시를 이루었을 때, 깜짝 놀랐다. 창원보다는 마산이 문화적으로 익숙해서인지, 당연히 마산시라고 할 줄 알았다. 아마도 이은상, 이원수, 지하련, 조향, 김춘수, 이영도, 구상 등 마산에서 꽃피운 근대문학의 유산에 빚졌던 젊은 날의 문학 공부가 영향을 끼친 탓이리라.
마산에는 국립결핵요양소가 있었고, 병을 얻어 요양하러 간 쟁쟁한 문인들이 동인지를 엮고 작품을 주고받으면서 일화를 남겼다. 애절한 최후를 마친 임화와 지하련이 연애에 빠져서 결혼에 이른 곳이 마산이다. 학창시절 문학을 맹세했던 친구들 몇이 있어 내려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술잔을 기울였던 곳도 마산이다. 조선시대에 창원대도호부가 있던 자리이고, 일제 강점 이래 역사의 변전에 따라 합병과 분할을 반복했을 뿐이니, 한 몸이 되었을 때 다시 창원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계속 껄끄럽다. 이진희씨가 말한다.
“얼마 전에 대형서점 체인 반디앤루니스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곳 사람은 책을 잘 안 읽습니다. 기계 및 소재 산업은 발달했지만 문화콘텐츠 생태계는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진해 지역에는 제대로 된 서점조차 없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많이 아쉽죠.”
100만 대도시에 서점은 겨우 51곳뿐
창원은 정말 거대하다. 상주인구 107만에, 지역 총생산 36조원을 넘는 도시로 KTX역만 세 군데다. 광주와 대전의 경제 규모를 뛰어넘은 기계 산업의 메카로 광역시 승격을 꿈꾸는 곳이다. 하지만 독서 문화는 빈약하다. 작년 9월 기준으로 서점 수는 고작 51곳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 2만 명에 고작 한 군데 꼴이다. 아마 이 도시가 마음에 아직 친하지 못한 건 경제가 문화를 지나치게 앞선 이런 분위기 탓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문화적으로 아직 격을 갖추지 못한 이곳에서 자라서 300여 명이 넘는 회원을 이루면서 단단히 뿌리를 내린 ‘독서클럽창원’의 존재는 더 거대하게 느껴진다. 이정수씨가 슬쩍 끼어든다.
“옛 마산 도심인 창동에 ‘학문당’이 있습니다. 창립 예순 해를 넘긴 전통 깊은 서점입니다. 어렸을 때 항상 그 앞에서 사람을 만난 후 영화를 보러 가는 등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놀던 기억이 납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같은 시집을 그 자리에서 사서 여자 친구한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마산항에서 막회를 떠서 소주 한잔을 걸친 후 길을 건너 시내 쪽으로 곧장 내려오면 창동이 있다.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심으로 사람들이 옮겨가면서 이 거리도 많이 퇴락했다. 학문당을 비롯한 노포들이 아직 몸을 버티고 정겹게 맞아주었지만,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여관에서 몸을 일으켜 새벽 안개에 축축이 젖은 텅 빈 거리를 더듬으면서, 개성 있는 독립서점이 들어서고 뜻 있는 이들이 몰려들어 거리 전체가 되살아나는 몽상에 젖는다. 독서클럽창원 사람들을 만난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아름다운 이국풍 카페가 양쪽으로 늘어선 ‘창원의 가로수길’ 용호동이다. 이정수씨가 말을 잇는다.
“처음에는 여기가 아니라 부산으로 모임을 다녔습니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 독서 클럽 카페가 있었는데, 회원 숫자가 수십 만에 이르렀습니다. 같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오프라인 모임이 부산에서 주로 열렸습니다. 따로 마산ㆍ창원 지역 모임은 없었죠. 거기에서 안면을 익힌 지역 사람 몇이 모여서 지역에서 모임을 해 보기로 결의했습니다. 2008년 8월이었죠. 모임은 쉽게 자랐습니다. 두 해 정도 열심히 모이는 중에 세가 생겼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책에 갈증을 느낀 사람들이 아주 많았던 겁니다.”
독서클럽 읽기의 난제는 ‘종교ㆍ정치책’
그런데, 독서모임을 진행한 지 두 해가 지난 2010년에 사달이 났다. 운영자가 특정 종교와 관련한 책을 여러 번 추천하면서 사이가 벌어져 모임 운영을 두고 치열하게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회원들이 크게 갈라져서 모임의 온라인 주소를 네이버로 옮기고 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초기 멤버였던 김정환씨가 말을 전한다.
“첫 이사 과정이 상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종교 분쟁 탓이었죠. 그 운영자분과 아직도 연락이 닿는데, 지금은 자기 잘못을 충분히 인지하십니다. 그 후에는 종교와 정치 쪽은 이야기하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두고두고 아쉽죠.”
독서공동체의 운영에서 정치와 종교가 가장 다루기 어렵다. 삶의 중요한 일부인 만큼 이야기를 피할 수 없지만, 가장 강렬한 신념 체계이므로 일단 말이 벌어지면 양보와 타협이 쉽지 않다. 서로의 차이를 과장하지 않고 차별과 배타가 아니라 존중과 배려로 이어지도록 하는 지루해 보이면서도 끈질긴 대화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선인의 지혜를 빌리자면, 마음은 진실하게 하고誠 태도는 경건하게 하며敬 자신이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으려 하는 사려仁가 필요하다. 이성호씨가 말한다.
“항상 책을 읽어온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날이 서 있는 경우가 많았죠. 모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이 많이 온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아도, 흔히 현실적인 힘이 작용하면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일이 때때로 못 견디게 싫었죠. 모임에 나오면서 남의 의견에 귀 기울여서 자주 듣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후기를 쓰면서 덤으로 글 솜씨도 많이 늘었죠.”
읽고, 쓰고, 얘기하고…다양한 모임 활성화
독서공동체는 민주주의의 연습장이다. 책의 저자들은 한 시대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독서는 정신의 눈높이를 높이고 마음의 웅덩이를 깊게 하며 영혼의 품을 너르게 만든다. 책을 같이 읽는 것은 그 높이와 깊이와 너비를 한층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려면 서로 머리를 한데 모으고 사정을 살펴가면서 공동체의 규칙을 정할 줄 알아야 한다. 낯선 이들이 모여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만큼,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대화를 배분하고 삶을 공유하는 규칙을 만들어 지키고 관계의 친밀함이 높아지면서 이를 조금씩 수정해 가는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다. 규칙을 자주적으로 마련하는 치열한 시간 없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자라난 독서공동체는 결코 유지되지 않는다. 현재 운영자 중 한 사람인 서헌씨가 말한다.
“2014년 모임에 다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운영자가 이유 없이 회원들을 강제로 내쫓고 카페를 폐쇄해 버렸습니다. 창원독서클럽에서 독서클럽창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재 회원 숫자는 305명입니다. 150명 안팎의 회원이 7, 8군데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 중입니다.”
모임이 생긴 지 여덟 해 동안 두 번이나 큰 위기를 겪고 불사조처럼 일어선 덕분에 독서클럽창원의 운영규칙은 아주 꼼꼼하다. 다른 독서공동체가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김병주씨가 이야기를 계속한다.
“한 달에 한 번은 쉽게 읽히는 책을 이야기하는 정기모임을 열고, 그 외에 진행자가 감동하거나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해서 공지한 후 선착순으로 10~12명 정도를 모집하는 책 번개 모임도 수시로 엽니다. 모임이 너무 커지면 토론하기 어려우니까 적당한 선에서 숫자를 제한하죠. 진행자는 모임별로 두세 명 정도 있습니다. 책은 한 달 전에 선정해서 공지하고, 토론 자료는 두 주 전에 배포합니다. 주로 진행자가 마련하는데, 간단한 내용 요약과 두세 가지 정도 질문입니다. 가입 후 세 달 이상, 책모임 참여 세 번 이상, 모임 후기 세 번 이상을 공유한 회원은 성실회원 자격을 줍니다. 성실회원이 되면 누구나 책모임을 개설할 수 있습니다.”
이 달에 열린 모임은 다섯이다. 정기모임은 레마르크의 『개선문』, ‘인문학 책번개’는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과학책 모임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심리학 책모임은 칼 로저스의 『사람-중심 상담』, 역사평전자서전 책모임은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 1926~1984』를 읽는다. 다채롭고 풍요롭다. 책의 높낮이도 다르고, 분야도 너르다. 이동원씨가 말한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걸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을까, 늘 궁금했습니다. 도서관 책모임에도 나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부 중심 모임이라서 저한테는 잘 안 맞더라고요. 좋은 모임이 없을까 해서 검색하다가 이 모임을 알았습니다. 모임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책의 스펙트럼이 아주 넓어졌어요.”
생각의 편식을 없애는 치유의 시간
독서의 편식은 흔히 생각의 편향을 불러일으킨다. 혼자 읽기는 때때로 그 기울기를 크게 만든다. 공동체를 이루어 같이 책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건강한 소통을 불러들일 뿐만 아니라 정신의 혈관들을 넓혀서 생각을 자유롭게 한다. 이진희씨가 말한다.
“책모임은 저를 치유하는 시간입니다. 이전까지는 독단에 빠져서 상대방한테 제 생각을 강요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지금은 제 머릿속을 100% 채우지 말고, 일부는 항상 비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창원은 아직 독서문화의 사막이다. 스스로 문제를 느끼듯, 행정구역의 숫자보다 서점 숫자가 더 적은 곳이다. 독서클럽창원은 그 사막에 시민들이 스스로 이룩한 소중한 오아시스다. 책에 목마른 이들이 같이 모여 이야기하고 글 쓰고 같이 삶을 나누는 정신의 어장이다. 창원 곳곳에 뿌리 내린 크고 작은 독서공동체가 모두 이곳과 이어져 있다. 남쪽의 항구도시에서 책으로 그물을 내려둔 정신의 어부들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다.
공동기획
한국일보사 / 책읽는사회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