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소개
김봉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부모님의 방치 속에서 자유로운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하며 현실의 뜨거운(?) 맛을 보았다. 현실에선 결과로만 말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과연 그게 내 인생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한 때 착한 아들로 살았으나 지금은 ‘태업’중이며, 어떻게든 ‘나답게’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심 작가를 만나는 행운 덕분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이석경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나를 설명하는 객관적인 값들이 경쟁력 없음을 알기는 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귀가 두꺼워 내 멋대로 신나게 산다. 한국 소설과 시를 즐겨 읽고 여기저기 발로 잘 돌아다니며 문뜩 쓰기도 한다.
김다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새내기 딱지를 떼긴 했지만 여전히 어설프기만 하다. 겁도 많고 소심해 늘 안정적으로 살아온 탓에 제대로 데여본 적조차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지루하게 살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 몰래 일탈을 꿈꾼다. 오랫동안 이고 있던 굴레를 벗어두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 해야 할 것이 뭔지 열심히 찾는 중이다.
한적한 오후, 어색한 첫 만남
토익 만점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시대 청춘의 고백록인『나의 토익만점수기』. 이 한 편의 소설로 중앙문학장편상을 수상하며 소설계에 출사표를 던진 화제의 작가 심재천 씨(이하 심 또는 작가)를 남양주의 어느 한가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가는 간소한 옷차림에 나긋한 목소리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김봉준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나누면서 배우려고 왔습니다.
심재천
뭐 배울게 없을 텐데요(웃음). 수업에서는 뭐 배워요?
김봉준
좋은 문장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실습을 합니다. 이번 인터뷰도 그런 관점에서 ‘좋은 문장’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취지가 있습니다.
심재천
그런 거라면 더 대단한 분들이 있을 텐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석경
처음 저희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어떠셨나요.
심재천
아, 서울대 학생들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인터뷰를 할 생각을 했을까 싶었죠.
김다은
대학생 인터뷰는 처음이신가요?
심재천
얼마 전에 숙명여대에서 특강을 했어요. 발상과 전개기법, 어떻게 하면 등단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해서요. 기자로서 문학상 심사에 참관하면서 생긴 비화, 느꼈던 점 등도 이야기했어요. 젊은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니까 지치지가 않았어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석경
당선됐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어요?
심재천
부모님이 좋아하셨죠. 부모님은 굉장히 저를 구박하셨거든요. 일도 안하고 책만 본다고. 아버지가 특히 싫어하셨어요. 이제는 아무 말 안하시죠. 상금 타고 돈도 조금 드렸어요.
파릇파릇(?)한 신인 작가랍니다
작가는 『나의 토익 만점 수기』로 제 3회 중앙문학장편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첫 발을 뗀 신인 소설가다. 수년의 노력 끝에 소설계에 입문하고 나서 작가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김봉준
평소 생활은 어떠신가요?
심재천
당선되고 나서 마음 놓고 놀고 있어요. 공부도 하고요. 집에서 먹고 자고, 인터뷰 있으면 인터뷰하러 나가고. 얼마 전에 단편을 하나 썼어요. 아직 달라는 데는 없어요. 이번 달(5월) 말에 단편집이 나와요. 『나의 토익 만점 수기』랑은 다른 순수문학 계통의 글이에요. 재미로 썼어요. 집에 TV와 인터넷이 없어서 심심하면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요.
김봉준
문학상 당선은 그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정말로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재천
제 글이 그다지 문학성이 있다거나 하진 않아 보여요. 진지하게 접근하시다 보니까 이런 글이 튀어 보이는 거죠. 메시지는 좋은데 너무 안정적이고 고상하면 심사위원들이 안 보는 경향도 있으니까요. 저는 진지하게 문학성을 말할 자격이 없어요. 사실 자기 혼자서 진지하게 접근한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 있지는 않거든요. 책을 내고 누군가 봐줘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니면 아무도 안 봐줘요. 아주 천재적이지 않은 이상은 일단 등단을 해야 존재감을 어필해줄 수 있죠. 어차피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을 거라면 제 나름대로 작품성 있는 걸 쓸 수도 있는 거고, 다른 사람의 비위에 맞춰서 쓸 수도 있는 거죠. 어차피 글로 하는 일이니까요.
사실 (문학상이) 될지는 몰랐어요. 심사위원들은 별로 안 좋아할 거라 생각하고 자신감 없이 냈는데, 아슬아슬하게 됐어요. 7명 중에 4명이 ‘오케이’ 해줘서 됐어요. 운이죠. 운과 ‘독기’가 잘 어우러질 때 당선이 되는 거겠죠. 만약 제가 지쳐서 포기했으면 지금은 글을 못 쓰고 있겠죠.
정말 독특한 녀석을 쓰셨군요!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성공‘수기’일 듯한 제목과는 다르게 현실풍자적인 ‘소설’이다. 토익 만점을 목표로 하는 학생이 수기인 줄만 알고 이 책을 읽는다면, 공부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토익에 회의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수기’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아부를 떨고 있지만, 속으로는 삐딱한 반항심을 품고 있는 당돌한 소설이다.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책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에 앞서,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자. 토익 점수가 낮아 고민하던 주인공이 토익에서 만점을 받기 위해 호주로 유학을 떠난다. 주인공은 바나나농장에서 마리화나를 재배하는 수상쩍은 농장주인 스티브를 만나고, 인질이 되는 조건으로 그의 집에 머물며 영어를 배운다. 주인공은 스티브의 집에서, 농장에서, 그리고 이웃 ‘수상한 부부’의 집에서 갖가지 일을 겪으며 상당한 영어실력을 쌓는다. 그러나 토익에서 고득점을 받을 준비가 되어갈 때 즈음 스티브의 농장에 마리화나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주인공은 스티브와 한 약속대로 인질 노릇을 충실히 하려 뛰어들었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한쪽 눈을 잃는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기어이 토익 만점을 받는다.
한 눈에 보아도 평범하지 않은 줄거리다. 주인공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된다. 주인공을 인질로 잡은 스티브는 바나나나무 아래 마약을 기른다. 아폴로 13호를 믿거나 이주일을 닮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전직 토익 성우였던 수상쩍은 부부들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부터 설정까지 상식을 벗어나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처럼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그야말로 개성이 넘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독특하게 만드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중 작가에게 가장 묻고 싶은 몇 가지를 추려보았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이 그 중 하나다.
김다은
왜 주인공은 이름이 없나요?
심재천
소설을 쓸 때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었어요. 소설의 주인공은 설정된 상황에서 액션을 하는 거죠. 비정상적인 행동 자체가 ‘주인공’이에요. 보통 소설에서 요구하는 친절한 설명, 성격묘사 등의 요소들은 다 뺐어요. 그래서 빠르게 읽을 수 있어요. 캐릭터끼리 부딪치는 순간만 잡아내려고 했어요. 예를 들면 케첩 통으로 마리화나를 피운다는 액션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각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전하고자 한 거죠. 그런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이름은 필요하지 않았어요. 모험적인 상황, 비이성적인 행동들에 주안점을 두었죠.
심 작가는 소설 형식에 도전하고자 주인공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 주인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그 주인공이 아니었다. 심 작가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상황이었다. 또 한 가지 소설 속에서 우리의 이목을 끌었던 요소는 전 토익 성우였던 외국인 부부였다. 작가는 그들에게조차 제대로 된 이름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A와 B로 불린다. 토익 듣기시험에 나오는, 얼굴 없는 목소리들처럼.
김봉준
외국인부부가 이름이 없이 A, B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굉장히 상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이 사람들이 토익에 매몰된 인간형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신건지 궁금합니다.
심재천
A, B는 생각 없이 지었어요. 듣기시험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지 않나요. 별 의미는 없어요.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소설에 대한 질문을 이어나갔다.
김다은
왜 굳이 호주를 배경으로 하셨나요?
심재천
처음엔 단편을 쓰다 장편으로 돌렸어요. 단편은 느낌이나 분위기가 딱 정해지는데, 장편은 길게 끌 소재, 배경, 캐릭터가 필요했어요. 저로서는 호주 여행에서 느꼈던 점들을 끌어다 쓰는 수밖에 없었죠. 토익에 대해선 할 말이 많았어요. 그래서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아둔한 캐릭터를 써서 해보려고 했죠. 내가 아는 것,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걸로 말이에요.
콩 심은 데 콩 난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에는 작가의 체험이 많이 녹아있다. 대책 없이 호주로 훌쩍 떠나 갖은 고생을 했던 경험이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무일푼으로 비행기에 올라타고, 기껏 외국까지 가서는 신물 나게 바나나를 따는 소설 속 인물의 ‘기행’은 사실 작가가 20대에 실제로 겪었던 경험에서 나왔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저절로 나오지 않았다. 콩은 콩 심은 데서 나는 법이다.
심재천
20대는 개망신의 시대였죠. 저는 항상 자의식이 세서 ‘맛이 나갈 것을’ 알면서도 이것저것 어기고 싶고 짓뭉개고 싶었어요. 대학교 때는 그런 행동이 허용되는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행동들도 많이 하면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항상 조금씩 무리를 했죠. 호주 여행만 해도 과도했다고 생각해요. 고생도 많이 했고 체력도 많이 소진되었어요. 그래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상도 받았겠지요. 호주는 재밌는 나라에요.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거기 애들이 참 독특해요. 거리연주만으로도 평생을 살고, 과일 따기로 연명하고, 걱정이 없어요. 마약 중독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왔어요. 그런 사람들하고 얘기도 해봤고요. 사람이 얼마나 다양하게 살 수 있는가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김다은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인가요?
심재천
제 20대와 비슷해요.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면서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다 때려 부수고 싶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혼재된 캐릭터가 나왔어요. 토익에 광적으로 목매지만 거기에 완전히 매몰되지는 않고, ‘이게 아닌데’하면서도 결국 그 길을 가는 거죠. 그래서 아버지와 요코를 넣어서 그런 마음을 전하고자 했어요. 외부에서 강요하는 바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 수 있다는 걸, 주인공 캐릭터와 함께 잡탕으로 보여준 거죠.
이석경
그런 인물들의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졌어요.
심재천
네. 맞아요. 바보 같기도 하고 어수룩하기도 하고 그렇죠.
토익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작가의 경험 중에서 호주에서 겪었던 일들 못지않게 이 책에 영향을 준 것은 토익 앞에서 끙끙댔던 기억일 테니까.
김다은
토익 시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심재천
젊은 사람들 겁 줘서 돈 버는 거죠. 토익 배워봐야 실질적으로 쓸 데도 없어요. 토익에 나오는 것들로 대화를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 식으로 대화하지도 않을뿐더러, 토익을 배우는 데 순수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문화를 배우는 수단으로서 영어를 배우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토익은 말도 안 되는 함정을 써서 일부러 틀리게 하는데, 그게 바로 기성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씌우는 올가미의 표본이 아닐까 해요. 협박하기에도 좋잖아요. 취직 안 되면 끝나는 것처럼 말이죠. 말 잘 듣게 하는 비결인 셈이죠.
(계속)
★ 인터뷰일자 : 2012년 5월 19일 토요일 ★ 인터뷰장소 : 남양주시, 창내호평역 근처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