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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때였어요. 라디오 들으면서 설거지를 하는데 진행자가 시 한 편을 소개하더라고요.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였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조향미 시인의 「온돌방」이란 시더군요. 그때는 시 제목도 모르고 그냥 들었어요. 그러다 점점 귀를 세우고 듣는데,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하는 대목에서 아련해지더니,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하는데 그냥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다음 시구가 계속 이어졌지만 그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장마처럼 젖은 생”만 곱씹으면서 설거지하다 말고 훌쩍였어요. 장작 때는 집에서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어릴 적에 뜨끈한 아랫목에서 자반처럼 몸을 뒤집은 추억은 있으니까 그 시절이 떠오르고, 나도 한때는 “노릇노릇 토실토실”한 아이였는데 이제는 장마처럼 젖은 인생이구나, 나만이 아니라 식구들이 다 그렇게 젖어 가는구나 싶고……. 사실은 그날, 원고 마감은 코앞인데 부엌일은 많고 몸살 기운까지 있어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시를 들으며 울고 나니까 마음이 맑아지면서 짜증이 사라지는 거예요. 시 한 편에 사람이 순해진 거죠. 아마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으실 거예요. 아직까지 없어요? 그러면 이번에 꼭 경험해 보기 바랍니다.
시를 읽으면 왜 마음이 움직일까?
시에는 이렇게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흔들어 깨우고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도대체 시가 뭐기에 삽시간에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걸까요? 문장이 멋져서? 시구가 좋으니까? 맞아요. 문장이, 시의 내용이 마음을 울리지요.
제가 『마녀의 독서처방』이란 책을 낼 때 편집자가 표지에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라는 문구를 넣었는데 그 문장에 혹해서 책을 샀다는 독자를 여럿 봤어요. 네, 최승자 시인의 「삼십 세」라는 시의 첫 구절이지요. 그 시가 발표된 게 1981년이니까 거의 사십 년 전입니다. 당시에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는 시구에 밑줄 긋던 분들이 지금 일흔 가까이 되신 건데, 놀라운 건 요즘의 이삼십 대도 그 문장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져서 밑줄을 긋는다는 겁니다. 여기 오신 이삼십 대 분들, 칠십대 노인 만나면 어색하죠? 할 얘기도 없고. 건강하시냐, 건강하시라 하는 말이 고작이에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분들도 예전엔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에 밑줄 그었어요. 어쩌면 지금도 그 문장을 보면 가슴 한쪽이 서늘해질지도 몰라요. 이런 생각하면 나이나 세대를 넘어서 할 이야기가 생길 겁니다. 또 얘기하다 보면 서로 비슷하게 통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고요. 그러니까 좋은 시, 마음을 울리는 문장은 시공간을 넘어서 사람을 이어 주는 힘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김이경, 『시 읽는 법』, 유유2019, 18~2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