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당신, 언제나 어디서나 잘 지내리라 믿으며, 오랜만에 소식 전합니다.
언젠가의 오래된 일기를 뒤지니 “오늘도 행복했다.”라고 짧게 씌어있더군요. 내가 쓴 건데도 그 짧은 일기가 마치 어떤 유명한 사람의 묘비명처럼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슬프고 외롭고 힘들었던 날들 중에도 행복했던 날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같습니다. 매일 매일 희망과 절망 사이 손을 길게 뻗어 희망 쪽 버튼을 더듬거리던 기억, 어차피 다 꿈이다, 그럴 바엔 즐거운 꿈 쪽으로 버튼을 누르고 다른 생각은 안 하기로 했던 날들, 언젠가 읽었던 누군가의 시 구절이 떠오릅니다. “꽃은 언제 질지 모른다. 아예 그런 생각조차 안 한다. 그래서 행복하다.” 그 말을 떠올리며 가만히 계절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당신의 편지 속, 달 착륙 우표를 상상해봅니다. 그 우표는 옛날 옛적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어쩌면 전생의 어느 시간에 내가 하얀 봉투에 붙여 당신께 보낸 그 우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어디나 별과 달은 같은 모양과 순서로 뜨고 집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달에 첫 발자국을 내디딘 그 유명한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말고 두 번째로 달을 밟은 에드윈 올드린Edwin E. Aldrin은 후에 「궤도 비행 중의 랑데부에 관하여」라는 학위 논문에서 “고요의 바다, 장엄한 폐허에 도착하다.”라고 썼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나 역시 장엄한 폐허의 바다를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죽고 나면 그 폐허의 바다에 도달하겠지요. 적막함 때문인지 달과 전쟁터는 많이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왜 세상의 모든 적막함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것일까? 좋은 상대를 만나 정말 행복했다면 아마도 나는 전쟁터가 아닌 평화로운 거리에 서 있었을까? 아니 평화로운 곳이 따로 있을 리 없는, 이 무작위로 쏘아대는 총성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당신과 내가 주고받았던 문장들은 컴퓨터라는 타임머신에 저장되어 먼 후세의 세상까지 전달될 수 있을까? 그때도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걸 계속하고 있을까? 우리의 아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만남 역시 우주비행사와 달의 만남처럼 궤도 비행 중의 랑데부는 아닐까? 편지를 쓰면서 나는 늘 문장을 고치곤 했습니다. 고치면 고칠수록 쓰려는 마음의 내용과 가까워지거나 오히려 더 멀어지는 불완전한 문장들처럼, 우리들의 삶도 매 순간 고쳐봤자 거기서 거기일지도 모를 일이지요. 당신과 나의 공통된 취미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극장 한 번 같이 못 가봤네요. 따로따로 뉴욕 맨해튼의 소호 안젤리카 극장에서 같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본 것 외에는 말이죠. 내가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토이스토리』였어요. 평론가들이 극찬을 해놓은 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서 기가 막혀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많은 장난감들을 거의 다 버리고 이사를 가는 풍요로운 사회의 아이들과 버려진 장난감들의 슬픈 생존기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깨끗한 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프리카나 난민 어린이들의 장난감, 알라를 외치며 전쟁에 뛰어드는 소년병들의 장난감은 총일까? 폭탄일까? 자본주의 사회의 너무나 일방적인 장난감에 대한 정의에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환상적이고 독창적이며 아름답다고 쓴 전문가들과 네티즌들의 반응에 기가 막혔습니다. 장난감이란 무엇일까?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지루함을 덜어주던 장난감은 우리가 아끼고 집착하는 만큼 생명이 깃든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마치 외로운 병사가 창녀와의 하룻밤에서 사랑을 느꼈다면 그녀는 생명이 깃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사랑은 마냥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 내가 좋아하던 장난감은 아버지가 사다준 ‘아기사슴 밤비’였어요. 언젠가 이런 기사를 보다가 그 옛날 내가 사랑한 장난감 밤비를 떠올리며, 사랑이 때로는 증오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어미가 멀리 있지 않음에도 외롭고 쓸쓸해 보여서 순한 아기사슴을 보면 쓰다듬어주고 싶어 한다. 사람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면 아기 사슴은 더욱 온순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지는 것이 아기 사슴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처음 몇 주 동안 어미 사슴은 오로지 냄새를 통해서만 자기 새끼를 알아본다. 일단 사람의 손길이 닿고 나면 새끼 사슴의 몸에 사람의 냄새가 배어든다. 미약하지만 오염성이 강한 그 냄새는 새끼 사슴의 후각적인 신분증명서를 쓸모없게 만들어버린다. 아기사슴은 가족을 만나자마자 버림받는 신세가 된다. 굶어 죽는 형벌에 처해진 거나 다름없는 그런 애무를 일컬어 ‘밤비 신드롬’ 또는 ‘월트디즈니 신드롬’이라고 한다.”
문득 우리가 사랑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수많은 몹쓸 사랑의 기억에 미안해집니다. 꽃에게도 새에게도 기르던 개나 고양이에게도 가족에게도, 한때는 사랑한다고 믿었던 연인에게도.
내가 사랑한 어린 시절의 밤비 인형도 나의 손길에 의해 서서히 낡아갔습니다. 너무 만지고 비벼서 헤진 밤비를 어린 외과 의사가 되어 바늘로 꿰매기도 했답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는 저 녀석은 의사가 되거나 구두 수선공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죠. 가난한 이민 가족의 가장인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가 되길 원하셨지만, 구두 수선공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답니다. 자신이 행복한 구두 수선공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아버지는 차라리 아들이 전쟁터를 떠도는 의사가 되기보다 구두 수선공이 되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옆집 어린아이에게 선물로 주었던 나의 아기 소년 밤비는 어디로 갔을까?
문득 모든 식료품에 씌어있는 유효기간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들은 선진국에서는 거의 다 파기하죠. 그걸 서로 가져가려고 애쓰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난민들의 대열이 떠오릅니다. 과연 모든 것의 유효기간은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 목숨의 시간을 의미하는 우리들 삶의 유효기간은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 문득 당신을 보러 간다던 나의 부질없는 약속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삶을 이어가는 것은 계속 약속을 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 가족과의 약속,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의 약속,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얼마나 많은 내가 살고 있었는지. 어쩌면 내 안에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실도피자, 거창한 인류애를 코에 걸고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사랑의 패배자, 당신을 만나러 간다고 한 그 하찮은 약속도 지키지 못한 악속 불이행자, 곧 뵈러 간다고 약속한 부모님께도 약속을 못 지킨 불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희미한 이런 구절이 떠오릅니다. “견뎌라 삶이여. 저 들판이 계절의 흐름을 견뎌내듯이.”
일을 하지 않는 시간, 환자를 돌보는 일에 몰두하지 않는 시간들을 나는 어떻게 견디어냈던 것일까? 이제야 사랑하는 습관으로 버티는 바람둥이형 인간들을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아내를 버리고 동성의 연인에게 가버렸던 당신의 전남편도, 세상의 모든 소음을 귓속에 담고 괴로워하던 당신의 언니도, 한국인과 중동인의 혼혈로 한국에서 태어나 IS에 가담해 전쟁터로 떠났던 간호사 아가씨의 연인도, 다 이해할 것 같습니다. 내 안에 그들이 다 함께 살고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여는 일, 그 환함을 가슴 가득히 받아들이는 일, 향긋한 커피를 내리는 일, 화분에 물을 주는 일 등, 아주 시시하고 평화로운 일상일지 모릅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만나러 간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당신의 친구 간호사 아가씨가 큰일을 당해 너무 놀란 나머지 거의 먹지도 못하고 말문도 열지 못하는 상태로 몇 날 며칠을 앓다가, 어느 날 아침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나 산책을 하고 싶다 하더군요. 그리고는 결혼식장에 데려다 달라는 거였어요. 왜냐고 물으니 전날 밤 꿈에 IS에 가담해 떠났던 그 옛 애인이 나타나 너도 죽고 나도 죽자며, 카불의 어느 결혼식장에서 만나자고 했답니다. 그녀는 그가 폭탄테러를 계획하는 것 같으니 가서 말려야 한다고 했어요. 미리 가서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그녀의 꿈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바람도 씌어줄 겸 마침 젊은 동료 의사의 결혼식에 그녀와 같이 갔습니다. 그곳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고. 신랑과 신부가 이슬람식 결혼식을 올리는 중이었어요. 멀리서 정말 간호사 그녀의 옛 애인인 듯한 청년이 군중 속에서 그녀를 알아본 듯 자신의 몸을 날렸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탄이 터졌어요. 그다음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아니 그 순간 이후, 나와 당신의 친구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으니까요. 장황하게 설명하니 눈물도 나지를 않네요. 저승에서는 아무도 울지 않는답니다. 다들 이곳으로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이곳에서의 며칠,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바그다드 카페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바그다드 카페는 이제 세상의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어쩌면 서울의 어느 모퉁이에 당신과 나의 영혼을 닮은 한 쌍이 오늘 개업을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거기 가서 나는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시리아 사막의 오아시스, 바그다드 카페에 엉뚱하게 걸려있던 당신의 그림이 그곳에도 걸려있는 걸 봅니다. 내가 갖고 있던 당신의 그림은 아마도 내 부모님께 전해지겠지요. 그 뒤로도 오래도록 누군가의 방에 걸려있을 겁니다. 그 사연을 알지도 못한 채 그 방의 주인은 그림을 팔거나 선물하거나 또 누군가에게 물려주겠지요, 그렇게 당신의 그림은 당신을 향했던 내 인생의 행복한 시간의 기억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지구의 마지막 날까지 영원하기를.
어쩌면 이런 식의 감정이 사랑일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많이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문득 결국은 내가 써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고만 『불안의 책』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더 좋은 시절의 왕자여. 나는 한때 당신의 공주였고, 우리는 다른 종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나를 아프게 한다.”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책』
어쩌면 우리가 나눈 편지의 내용이 다 불안의 책은 아니었는지, 아니 인간의 역사가 다 불안의 역사는 아닐는지, 다시 이런 구절이 떠오릅니다.
“인생은 부질없는 것을 통해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여정이다.”
― 가브리엘 타르드
그리고 그 길고 지루하고 끝이 없는 우리들 인생의 불안을 묘사한 『불안의 책』 속에서 나는 많은 위안을 느꼈다는 걸 고백합니다. 몸과 마음을 지닌 모든 생물은 아프고 괴로운 가운데, 드물게 작은 행복들을 누리다가 결국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단 하나의 진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아니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한순간도 신을 믿지 않았던 나는 이제야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합니다.
어쩌면 정말 “신은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황주리의 「바그다드 카페」는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