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출하게 살던 예민한 나는 몇 달 전 진돗개를 집 안에서 기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커다란 수컷 반려견이름은 '우미'과 함께 살면서 신경은 조각조각 분산되고 대소변 유도를 위한 매일의 산책으로 녹초가 됐다. 내 글은 그렇다 치고 남의 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비교적 간단하다 생각했던 서평조차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마감을 넘겼다. 갈대가 흔들리는 늪을 따라 우미를 산책시키면서 부끄러움과 뭔지 모를 수치감에 몸이 떨렸다.
작은 일에도 당황하는 나와는 달리 소설 속 두 여성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강인했다. 나와는 피든 뭐든 다른 것만 같았다. 『나폴리 4부작』한길사, 2017의 두 주인공인 ‘레누’와 눈부신 친구 ‘릴라’. 이들은 한 몸에 난 두 머리들처럼, 한 머리가 이성을 담당할 때는 다른 머리가 감성을, 한 머리가 좌절할 때는 또 다른 머리가 용기를 북돋고, 혼란스러워할 때 다른 머리가 지혜를 발휘하는 식으로 힘을 합쳐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의 폭력, 가난, 파시즘, 가부장제, 그리고 모든 걸 녹여버리는 시간에 맞선다. 그리고 목표였던 놀라운 책을 써낸다. 소설 속 그 책이 이 책 『나폴리 4부작』인데, 주인공인 레누가 책 속의 작가이고 책 속에 쓴 책이 이 책 자체가 된다. 여하튼 이 둘이 책 밖에 존재했다면 가난과 계급 문제, 여성 문제와 정치적 이슈와 정체성 찾기라는 갈급한 문제들이 버티고 있는 삶의 투쟁 속에서 커다란 흰 개는 고려 대상이 안 될 것 같았다. 개를 키우느라 글을 못 쓰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개 따윈 제압해버린 뒤 이 순간에도 책상으로 달려가고 있을 것 같았다.
4권을 합쳐 2,300쪽이 넘는, 벽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이 책들에서 개는 부정적인 은유로만 잠깐씩 언급된다. ‘주인의 뒤꽁무니만 쫓는 충성스러운 개처럼’ 같은 비유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 실제론 우미가 앞서나가므로 내가 우미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지만 ─ 개에게 애면글면하는 나로선 유일하게 개가 실제 등장하는 결말부에서 쫑긋 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최근 산 래브라도를 데리고 신문 가판대에 들렀다 발렌티노 공원에 가서 개와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신문을 뒤적이기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낸다.’(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661쪽)
서사가 끝나기 직전, 쓰던 소설을 완성시킨 레누가 이젠 릴라가 아닌 개와 남아있는 장면이다. 인생의 강렬한 시간들이 지나버린 뒤에야 개를 키운다는 듯,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이제는 뭔가에서 제외되거나 뭔가를 제외해버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쓸쓸한 문장이었다.
순간 나는 그간에 간단한 서평조차 못 쓴 이유가 우미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책의 서평이어서 그랬다는 걸 알았다. 이 놀라운 책과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심정의 복잡함 때문이랄까. 내 인생은 아직 시작도 안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남들이 그렇게 볼지도 모를 하찮은(?) 개와의 관계 정립에 쩔쩔매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반면 책 속의 릴라와 레누의 60년간의 우정은 한 순간의 낭비도 없이 밀도 높게 진행된다. 서사가 진행될 때마다 둘의 상황이 시소처럼 서로의 비참과 행복을 교차반복하면서도 서로를 끌고 밀면서 세상에 맞서 나아가고 있다. 이런 관계가 내 신경을 긁었다. 책을 덮으면 눈앞에 떠오르곤 하던 릴라와 레누의 강력한 빛에너지가 하늘 위에서 나를 굽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릴라를 생각하면 이글거림에 눈이 멀 것 같았고 몸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두 친구가 합쳐져 하나의 인물로 화해서 어떤 것도 찌를 수 있는 광선검처럼 보였고, 어떤 칼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로 변하기도 했다.
반면 나의 개와의 관계는 애매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나는 이 개가 맹수인지 야만인지, 진화를 거쳐 순화된 늑대인지, 내가 이성적 인간을 연기해야 하는 건지, 내가 제압해야 하는 대상이 개인지 아니면 무엇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인지, 우리가 서로 친구인지, 나를 향하고 있는 이런 존재를 내가 얼마큼 돌보고 얼마큼 무시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불쌍한 개에게서 뭔가를 얻기 위해 입양한 게 아니었는데 어쩌면 분명한 이유가 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 관계를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산만한 정신을 가다듬고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릴라는 온몸으로 던지듯 삶을 살아가면서도 삶의 이면을 꿰뚫는 매 같은 눈을 가지고 있다. 주변의 모순뿐 아니라 자기모순까지 가차 없이 비웃고 결국 자기 실존을 껴안고 살아가는 ‘삶의 천재’다. 레누는 그런 친구와 똑같아지고 싶고, 그렇지 못해 좌절하고 그런 릴라와 수치스러운 자신에 대해 써내는 ‘작가’다. 하지만 우미란 개는 내게 머리를 번쩍 뜨이게 하거나 예술적 영감을 주는 릴라 같은 친구 역할을 해줄 리는 없었다. 그뿐 아니라 머리가 아닌 ‘몸의 산책’만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월요일독서클럽의 한 회원이 말했듯이 우미는 내게 타자임이 분명했다. 처리할 수 없는 타자.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다시 『나폴리 4부작』을 되짚어 떠올리자 레누에게 릴라가 다정한 친구는 분명 아니었고, 처음부터 그들이 찰떡궁합으로 합쳐진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0년대 중반 여섯 살이었던 레누와 릴라의 우정은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60년간 지속되는데, 이 관계란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격렬한 투쟁에 가깝다. 이 소설은 레누가 릴라와 자신이 다름을 뼈아프게 인지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 천재이자 광인인 릴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투쟁의 기록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반전을 선사하는 아주 짧은 챕터를 제외한다면 그 바로 직전까지의 소설의 제목은 ‘레누의 투쟁’ 정도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폭력이 횡행하는 이탈리아 남부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레누와 릴라. 소설의 첫 부분에서 예순여섯의 릴라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삼십 대부터 늘 사라지고 싶다고 말한 릴라였다. 진짜 사라질지는 몰랐다. 레누는 사라진 릴라에 대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릴라의 징글징글한 삶이 그냥 묻혀버리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말하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레누가 관찰한 릴라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릴라전’이 아니다. 이건 레누라는 작가 자신의 일인칭 고백록에 가깝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릴라를 기준으로 두고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인데, 뭐든 빨리 이해하고 원하는 것을 해내고 어릴 때부터 뛰어난 소설 『푸른 요정』을 써낸 릴라에게 품은 레누의 열등감과 존경심, 탄성과 탄식, 오직 릴라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투쟁, 릴라와는 다른 놀라운 성공의 길을 걷게 되는데도 늘 릴라를 염두에 둔 행동과 선택을 해 릴라의 삶과 사랑을 베끼고 어릴 때 썼던 소설과 일기까지 베껴 소설로 써서 성공했다는 것을 밝히는 등 지나치게 릴라에게 밀착되어있는 삶의 과정을 그려내는 레누의 이야기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레누의 삶과 릴라의 삶은 극으로 갈린다. 레누가 유명작가로 성공하게 되는데도 나폴리에서 단 한발자국도 나가본 적이 없는 릴라가 하려고만 했다면 자기보다 훨씬 멋진 소설을 썼을 거라는 상상에 매달린다. 쓰여졌을 지도 모를, 전혀 발표되지 않을 릴라의 소설에 대한 상상, 시간을 뛰어넘을 게 분명한 그 상상의 소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어딘가에 있을 릴라의 소설에 도달하기 위해서, 혹은 그 소설에 대한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소설을 모질게 써나간다. 그런데 레누가 쓰는 소설이란 반쯤은 릴라의 이야기이자, 그 나머지 반조차 릴라에 의해 추동된 레누의 선택과 행동, 생각들이다. 릴라가 불러주고 레누가 적는 것 같다. 릴라가 4권에서 맞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까지 레누는 자신의 소설로 출간하게 되는데 그 소설 속 소설 『어떤 우정』으로 예전의 작가로서의 명성은 되찾는다. 하지만 자기를 고백하는 이 『나폴리 4부작』은 레누가 소설로 써낸 이야기가 실제 릴라의 현실이라는 것을 누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도 이것이 레누 자신의 소설이라고 강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은 글쓰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레누의 생각을 드러낸다.
무엇 때문에 릴라의 기분이 그토록 상한 건지 잘 모르겠다. (중략) 타고난 천성, 자신이 처했던 환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내가 이루기를 바랐던 릴라와 그런 릴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화가 나서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도 자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릴라와 수개월 동안 쓴 글로 그런 릴라에게 경계가 해체되지 않은 형태를 만들어주고 릴라를 이겨내 릴라에게 평안을 찾아주고 그로써 나도 평안을 찾으려 하는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654쪽)
즉, 작가가 강력한 정신적 흔적을 남긴 주변 사람에 대해 쓰는 것은 작가의 죄책감의 핵이며, 많은 작가들이 말해왔던 자신을 타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로서의 작가라고 자리매김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라는 것이다. 그렇게 가져다 쓰는 것은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레누는 주변 사람들이 작가 자신을 위한 것으로 소설 속에서 활용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는 한편, 그렇다 해도 작가가 그 사람들을 글에 넣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에서 제거할 수 없는 무서운 자유에 대한 갈망, 즉 충동적인 타자를 소설로 가져와 서사 안에서 조화롭게 만들고 그 안에서 평온을 취하게 함으로써 작가 자신과 독자에게 타나토스가 아닌 에로스를 선사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이 레누의 목소리다. 즉 서사를 짜서 소설 안에 사이렌을 가두는 방식이 소설이며, 우연과 파괴와 카오스와 방향을 알 수 없이 튀어 오르는 경계가 해체되는 즉 '릴라적'인 것은 글로서 짜여질 수 없는 것이라서 그것을 '레누적'인 이성으로 서술함으로써 소설이 태어났으니 이 소설은 레누 자신의 것이며 릴라를 드디어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레누가 쓰겠다고 한 소설이다. 소설은 어떤 극복의 산물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작가란 드라큘라처럼 무시무시한 존재로 느껴지고, 릴라는 소설을 위해 희생당한 비극적 인물로 읽힌다. 한편으로 글 속에서 릴라를 영원히 소유하려는 작가 레누의 끈질긴 욕망도 읽힌다.
하지만 『나폴리 4부작』이란 이 소설의 끝에는 「반환」이란 마지막 장이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실 레누가 쓰겠다고 한 소설이 이 소설이라고 앞서 내가 말했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이 「반환」까지가 『나폴리 4부작』이기 때문에, 이 소설의 진짜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주장은 이 마지막 부분까지를 읽어야만 알 수 있게 된다.
이 아주 짧은 마지막 부분은 완전히 사라진 릴라가 레누와 함께 어린 시절 가지고 놀다 일부러 지하실로 떨어뜨린 인형 두 개를 보내오는 장면이다. 이 인형 장면은 회상이 시작되는 가장 첫 부분에서 나오는 장면이므로, 서사는 원처럼 닫힌다. 이들이 잃어버린 인형을 릴라가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보내온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 대하소설의 서사는 릴라가 인형을 떨어뜨림으로써 문을 여는데, 릴라가 인형을 보내옴으로써 이야기는 끝난다. 인형은 모두 이제 레누의 것이며, 릴라는 완전히 그 인형들에서 멀어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시작하게 인형을 떨어뜨리고 인형을 반환해서 이야기를 닫는다는 건 릴라였다는 점을 알게 된 레누는 릴라에게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실감한다. 동시에 릴라가 인형을 보내왔다는 것은 레누가 자신에 대해 쓴 것에 대해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은 정말 만만찮은 자들이다. 서로가 한 일에 대해서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식으로 끝없이 맞대응하면서 절대 먼저 우정을 깨는 법이 없다. 릴라의 전언은 이렇게 들린다. “내가 삶을 힘껏 살아내서 네가 그걸로 글을 썼다면, 그 글로 나는 만족해. 내 삶 모두를 너의 글에 네 방식대로 쓴 것도 괜찮아. 삶의 가장 큰 상처조차 써낸 것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어.” 이 긴 글을 단 한 번도 지루하지 않게 밀도 높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서술한 작가 레누의 대단한 친구답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상상 속에서 아름다웠던 인형들이 실제로는 못생긴 인형들이므로 현실은 그렇게 이상하고 못생기고 남루한 것들을 깔고 있다는 것을, 레누 네가 쓴 그 아름답고 정교하게 짜인 소설들이 사실은 해석일 뿐 실제는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듯이 보인다. 그 점을 레누라는 작가는 쓸쓸히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은 어떤 해석일 뿐, 작가가 현실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라고. 그러니 뭔가를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라고. 삶은 아주 무시무시한 지배될 수 없는 거라고. 그리고 소설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그러니 그런 너를 이해한다고.
그런데 우리의 레누가 마지막에 당하고만 있을 건가. 『나폴리 4부작』은 여기서 끝나지만, 현실까지 잠입해 들어와 이어진다. 이 소설의 진짜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익명의 작가라 누구도 그 존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기자들이 아무리 찾아내려 해도 못 찾았다고 한다. 소설 속 레누는 엘레나의 애칭이다. 엘레나 페란테는 익명을 택해서 작가의 불멸과 현실의 영광을 버린다. 소설 속에 자기의 주변 인물을 가져와서 불멸을 얻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작가 자신이 소설 속 인물이 되어, 혹은 현실의 죽음이 되어 ─ 실제로 엘레나나 레누나 어떤 이름이 되어도 좋은 것이다 ─ 소설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엘레나는 출판사가 대신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글을 쓰고 나면 작가는 필요 없다.” “작가는 자신의 글 안에 있다. 단순하게 글쓰기를 통해 작가 자신을 대중에게 보여준다면 익명성은 단지 소설 한 구절의 일부가 될 것이다.” 즉, 엘레나인 레누와 릴라는 글 속에서만 숨 쉰다. 특수한 상상의 물고기들이다. 그러니 레누가 릴라에게 이렇게 되묻는 것 같다. “너를 이용한 것만은 아니지?” 그러자 릴라가 대답할지도. “소설은 네가 써. 나는 사라질 거야. 하지만 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