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날이면 날마다 극적인 사건으로 넘쳐난다. 기적 같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중 하나는 70년 동안 원수처럼 지냈던 남북이 느닷없이 서로 친구가 되자고 제안한 일이다. 실향민도 아니면서 갑자기 가슴이 설렜다. 조선희의 『세 여자』한겨레출판, 2017에 등장하는 1920년대 붉은 혁명전사 맑스껄들처럼 경성에서 신의주로 넘어가서 연안이나 몽골을 가로질러 모스크바로 가는 육로가 열릴 수 있을까? 여성인 ‘우리도 사람이다’를 외쳤던 그들은 목숨 걸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가 열린다면, 역사적 유물이 되어버린 그들의 발자취를 한 번 뒤따라 가보고 싶었다. 그런 기회에 대한 기대가 자라는 중이다.
또 다른 기적은 #미투 운동처럼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사소한’ 성추행 한 번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집안에서, 동네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버스에서, 직장에서, 우리 사회의 성희롱, 성추행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관행이었다. 성폭력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 가해자는 뻔뻔했고, 피해자는 숨죽였다. 피해자는 헤픈 여자이거나 꽃뱀으로 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 참고 견뎠던 여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미투’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기적 같은 #미투 운동이 우리 사회에 ‘인간다운’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여성이 성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시대가 열리 수 있을까? 맑스껄들이 꿈꾸었던 그런 세상이 도래할까?
#미투 운동의 와중에 존 쿳시J. M. Coetzee의 『추락』Disgrace, 1999을 학생들과 함께 읽게 되었다. 독서는 시대정신과 무관하게 무중력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의 반응은 단호했다. “이건 강간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어떤 비평가도 강간이란 말조차 언급하지 않는 거죠?”라고 분노했다. 학생들의 반응과 마주하면서 비로소 과거에는 나 또한 놓쳤던 강간의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소설에 관한 다른 비평도 읽어보았다. 아이스 피켈이라는 평론가는 존 쿳시의 소설이 “새로 탄생한 남아프리카한테 두들겨 맞아 개처럼 코너로 몰리고 굴욕을 당한 진보적 학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 소설의 역자는 데이비드 루리라는 진보적 지식인이 자기 시대를 통렬하게 비판하다 추락한 시대의 희생양인 양 안타까워했다. 거의 모든 논평이 추락한 남성지식인이 어떻게 자기구원에 이르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미투의 시대정신으로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본다면, 텍스트의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 루리가 저지른 성폭력이었다. 성폭력을 성폭력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독자를 설득하는데 300페이지가 할애된 셈이었다. 이 지점이야말로 이 소설이 주는 묘미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이 부분이 텍스트의 침묵으로 남아 있어야만 데이비드 루리는 좌파 지식인으로서 체면을 유지하게 되고 자기성찰에 이르는 인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루리는 진보적인 백인 남성 교수다. 젊은 시절 그는 지적이고 잘생긴 외모로 여자깨나 홀렸다. 그의 눈길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없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오십이 넘은 지금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지만 마음과 달리 젊음과 매력은 사라졌다. 이혼남인 그는 성욕을 매춘으로 가볍게 해결한다. 하지만 느닷없이 그에게 ‘에로스’가 찾아든다.
루리는 자기 학생인 멜라니 아이삭스가 앞서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잡는다. 교수의 접근에 멜라니는 ‘교활하고’ ‘요염하기도 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아래로 깐다.’ 그래서 루리는 멜라니의 볼을 어루만지면서 말한다.
"오늘밤 나하고 같이 지내."
"왜요?"
"그래야 하기 때문에."
"왜 제가 그래야 하죠?"
"왜냐고? 여자의 아름다움은 여자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은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박애심의 일부야. 여자는 그것을 나눠가질 의무가 있지."
멜라니는 루리 교수가 자기 집으로 가서 와인 한잔하자고 했을 때 망설이지만 거절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은 벌어졌다. 루리 스스로 생각하기에 딱히 강간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비친 멜라니는 ‘교활하게’도 먼저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으니까. 그럼에도 ‘여우의 이빨이 목을 물어뜯으려고 할 때의 토끼같이 축 늘어져 있는 멜라니와의 관계가 사랑이었을까? 그의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멜라니의 남자친구와 아버지가 이 사실을 학교에 알리고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리게 된다. 동업자 윤리라는 것이 있으므로 진상조사위원회 교수들은 가능한 그를 해직시키지 않으려 한다. 동료 교수들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심리상담치료와 사회봉사명령을 이행한다면 해직은 면해주겠다고 제안한다. ‘내로남불’이라고 했던가. 루리에게 그것은 사랑이었으므로, 사과할 수 없다고 그는 잘라 말한다. 루리는 연애와 같은 사생활이 공적인 장으로 소환되면서 개인의 자유가 증발하는 사태에 분노한다. 그에게 이런 사태는 인간본성에 반反하여 개인의 자유를 짓밟는 인민재판과 다를 바 없다.
그가 저지른 성폭력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진보적 남성지식인이 저지르는 전형적인 행태처럼 보인다. 자신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든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바치는 숭배와 사랑이 느닷없이 성폭력이라는 치욕적인 보복으로 되돌아오다니, 루리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멜라니는 찾아와서 그의 집에 잠시 머물 수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던가. 많은 데이트 폭행, 성폭력에서 연애와 성폭력의 경계는 모호하다. 피해자 또한 때로는 성폭력의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가해자와 연애 관계이기를 바란다. 그들은 성폭력을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안면이 있는 사이에서 순전히 일방의 성폭력이라고 주장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런 지점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법은 피해자에게 완벽한 피해를 증명하라고 명한다.
루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춘/성추문/사랑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하다. 그의 눈에 학내성폭력, 성추행, 성희롱에 관해 매뉴얼들은 남성을 거세하려 드는 페미니스트들의 권력의지로 읽힌다. 사랑을 권력 관계로 해석하고, 나이를 초월한 세대 간 사랑루리의 경우처럼 아버지와 딸 또래을 원조교제로 간주하는 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다. 루리는 자신의 행위가 법적으로 ‘유죄’임은 인정하지만 사과할 것이 없다면서 대학을 떠난다. 루리의 주장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이 들게 만든다.
삶은 잔인한 아이러니다. 루리가 찾아간 곳은 딸 루시가 살고 있는 농장이다. 딸과 생활하면서 마주친 치명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는 뼛속까지 굴욕을 맛본다. 세 명의 흑인들에게 딸은 강간당하고 루리는 거의 죽다 살아난다. 루리는 치욕에 몸을 떤다. 그는 딸에게 강간범들을 신고하고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지우고 안전한 네덜란드로 떠나라고 권한다. 자기가 멜라니에게 한 짓과 유사한 일이 딸에게 재연되었을 때, 루리가 루시에게 권한 행동은 그가 조롱했던 바로 그 페미니스트들의 매뉴얼 대로였다. 루리는 딸에게 가해진 성폭력을 목격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멜라니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루리의 반성적 성찰을 위해 왜 여자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루시는 현실감을 지닌 인물이라기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들이 저지른 역사적 부채를 청산하는데 필요한 작위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작가는 오랜 세월 백인 남성 지배 정권에게 당한 복수를 왜 백인 여성을 강간하는 것으로 제시해야 하는가? 작가로서 너무 게으르고 진부한 상상력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루시가 수동적인 속죄양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레즈비언이자 공동체주의자인 루시는 성폭력 앞에서도 의연하게 삶을 꾸리고자 한다.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걸 배워야죠. 아무것도 없이. 어떤 것밖에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카드도 없고, 무기도 없고, 재산도 없고, 권리도 없고, 위엄도 없고.”라고 말한다. 그러자 루리는 “개처럼” 굴욕적으로 살 거냐고 되묻는다. 루시는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낳고 그녀의 재산을 강탈하고자 음모를 꾸민 흑인 남성인 페트루스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 페트루스의 우산 아래로 들어감으로써 자율적이고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나직이 말한다. 과연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루리는 딸의 굴욕 앞에서 모든 것을 잃고 “개처럼” 철저히 추락한다. 그가 작곡한 벤조 음악과 교감하는 존재는 절름발이 수캉아지뿐이다. 짐승의 차원으로 떨어진 루리와 절름발이 수캉아지는 서로 동등한 차원이 된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루리가 진정으로 수치심을 느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루시의 강간을 목격하고 난 뒤 그는 멜라니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늙은 아비로서 두 남자는 서로 공감한다. 멜라니의 아버지는 남자들에게 느닷없이 찾아든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지 않느냐고 말하는 루리를 이해해준다. 멜라니는 두 남자 사이에 공감을 이끌어내는 매개체로 교환된다. 루리는 끝까지 멜라니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루리는 진정으로 자기성찰에 이르지 못한다.
이 소설은 성폭력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와 같은 매뉴얼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무수히 많은 해석에 열려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투의 시대정신 속에서 이 소설을 다시 읽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텍스트의 맹점이 보였다. 멜라니에게 제대로 목소리를 부여해준 적이 없는 화자가 1차 가해자였다면, 텍스트의 공백으로 남은 그녀에게 귀 기울이지 않았던 무심한 독자로서 나는 2차 가해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