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말하자면 행동중독의 하나였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의학적인 중독은 마약, 음식, 알코올 같은 물질 남용을 의미한다. 인터넷 중독이 대두되며 행동중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근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행동중독이 뇌에서 작용하는 방식은 기존의 중독들과 별다르지 않다. 모든 중독은 그 중독을 촉발하는 환경과 사람이 한 덩어리로 작용한다. 그래서 재활 치료를 받고 끊었다가도 원래 중독 행동을 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면 쉽게 재발한다.
그런데 술이 행동중독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 부부가 술을 소비하는 방식이 알코올 자체에 대한 중독보다는 하루를 구성하는 규칙에 속한 의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밤이 될 때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최선과 완벽을 추구하는 낮 시간을 보낸 후, 풀어지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었다. 업무부터 일상까지 잊지 않고 처리해야 하는 무수한 과제들 앞에서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며 애쓰다 보면 실제의 성취도와는 무관하게 저녁에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둘 다 은퇴를 하고 집에서 노는 첫 몇 년 동안에도 심지어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오늘 할 일을 궁리하다가 어스름을 맞는 나날에도 그런 마음의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면 최선을 다해 괴로워해야 했다. 그런 낮시간을 보내고 밤이 찾아오면 널브러져야만 했다. 설사 그럴 필요가 없었던 백수일지라도 밤에 널브러지고 나면, 내일은 뭔가 꽉 차고 보람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술을 사 오는 일이 점점 귀찮아지고, 술을 따르는 일조차 서로에게 미루는 일이 잦아지면서 술이 생활에서 말라버렸다.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그전에는 혹시라도 술이 떨어지면 아무리 깊은 밤에도 24시간 영업하는 가게를 찾아 헤맬 정도였으니까. 그때 알았다. 밤이 되어도 우리는 이제 널브러질 필요가 없었다. 물론 필요는 이미 예전부터 없어졌는데, 행동과 마음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온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