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라는 거대 명제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근대가 개막되려면 중세 질서로부터 분리된 ‘개인’이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보편적 명제일 것이다. 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이 그러했다. 메이지 정부는 봉건 체제의 영주와 무사 계급을 중앙 집권 국가의 관료로 등용하면서 막번幕藩 체제의 신분 질서를 해체하고 사민평등을 표방했지만 여전히 신분 차별은 강하게 잔존했다. 이에 평민을 대변하는 의회 개설과 조세 재도의 전면 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개혁파 세력은 일반 서민의 전폭적 지지에 힘입어 이른바 자유 민권 운동의 시대(1873~1889)를 열었다. 천황제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귀족과 지배층 중심의 제한적 혁명을 거부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확대 실시할 것을 주창한 것이다. 이들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과 사민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를 정강으로 내세운 자유당을 창당하면서(1881년) 본격적인 의회 정치를 향한 사회 운동에 돌입했다. 메이지 정부가 적극 추진한 산업 정책과 근대적 교육 정책에 의해 산업 노동자, 상인, 도시민, 전문가들이 대거 출현하고 있었기에 인민의 권리, 즉 민권 신장을 향한 서민의 지지는 어느 때 보다 높았다. 프랑스에 유학했던 나카에 조민이 루소의 《사회 계약론》을 《민약역해民約譯解》로 번역했던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1882년, 자유당과 입헌개진당이 함께 계몽주의를 확산하여 도시민과 농민을 입헌 자유주의의 주역으로 승격시키려던 그때였다.
그런데 봉건 질서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이 ‘각성된 평민’을 어떻게 호명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자유를 체득한 개인’을 미국에서 목격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도 《서양사정西洋事情》(1871년)을 출간할 당시 적절한 개념을 찾지 못했다. 사회 개념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던 그때, 후쿠자와는 사람(human being)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를 ‘人間’으로 번역했고 개별 인간을 지칭하는 번역어로 ‘一身’, ‘一人’, ‘一人の民 ’을, 그들의 무리를 ‘世人’, ‘天下の 衆人各各’으로 표현했다. 1875년 출간된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에서도 ‘人’, ‘人各各’이 주로 쓰였다. 민권 운동 초기 문명개화론의 앞장에 섰던 일본 지식인도 아직 숫자 범주와 무리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숫자 개념으로서 一人, 보통 명사로서의 인간 개념이 근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권리 의식을 터득한 ‘개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토크빌이 미국에서 관찰했듯이 ‘개인’이 자유와 권리 의식을 내면화하고 시장을 바탕으로 그들의 세계관과 행동 양식을 확산하는 주체를 지칭한다면 그 존재야말로 말안장 시대를 근대와 접속시키는 추동력이다. 일본 근대 문학의 기초를 세운 쓰보우치 쇼요(1859~1935)와 후타바테이 시메이(1864~1909)의 소설 이론이 나온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이들은 문학이 선거, 자유, 평등, 민권 등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정치적 요구를 담아내는 창구가 되어야 한다는 각성하에 소설을 인정人情의 진정한 모사模寫, 즉 인간의 정서와 심리에 대한 사실주의적 모사로, 사회적 실상을 정밀한 눈으로 투시하고 진리를 잡아내는 정교한 탐사(探査)로 규정했다. 이들이 출간한 《소설신수》(1885)와 《소설총론》(1886)은 자유 민권 운동에 대한 문학적 호응이자 일반 독자를 일인一人, man에서 개인個人, individual으로 승격시키려는 계몽주의적 시도였다. 정밀한 눈과 정교한 탐사는 이성의 힘이자 자유에 대한 근대적 시선이었다. 이런 사회적 흐름과 지적 노력에 힘입어 1880년대 중반 ‘일인’은 ‘개인’으로 번역되기에 이르렀고, 학계와 언론계,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도 개인은 근대적 주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숫자, 범주 개념에 미래 지향적, 운동론적 의미를 부가하여 일본의 말안장 시대를 자유주의적 근대로 끌고 가고자 했다. 개인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말안장 시대에는 개인이 태어났는가? 분명하게 답하기 어려운 이 질문은 조선에서 근대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 핵심적인 지점에 놓인다. 적어도 자유를 의식한 개인, 새로운 질서가 상승하는 공간에서 주체 의식을 내면화한 개인이 없으면 근대도 없다. 앞 절에서 고찰한 분리와 분화는 결국 ‘개인의 탄생’과 맞닿아야 본격적인 근대로 돌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94년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말안장 시대가 일단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기와 애국 계몽기로 일컬어지는 시간대로 진입할 때 자유와 권리 의식을 내면화한 개인은 존재했는가? 우리의 용어로 바꾸면 문해인민은 근대를 출범시킬 각성한 인민, 또는 ‘진정한 개인’으로 진화했는가?
미리 밝혀 두자면, 그렇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일인’, ‘일신’에서 ‘개인’으로 진화하는 내적 요건은 어느 정도 성숙되었으나 그것을 본격적으로 발화시킬 외적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다. 중세적 통치 질서가 너무 길게 늘어진 탓에 ‘근대적 개인’의 탄생은 지체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자궁에서 그것을 깨뜨릴 모순이 싹튼다는 마르크스적 표현을 빌리면 근대적 개인이 중세적 자궁에서 발아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깨고 나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비유할 수 있다. 중세의 수명이 의외로 끈질겼거나 중세를 마감할 인민의 여력이 부족햇거나 아니면 둘 다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반상등급, 관존민비,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타파를 선언하고 평민도 인재로 등용할 것임을 천명한 갑오개혁을 경과한 이후에도 ‘근대적 개인’은 아직 본격적으로 호명되지 않았다. 1896년 창간되어 인민의 천부 인권설을 제창했던 《독립신문》도 ‘개인’보다 ‘자기(自己, 긔)’를 즐겨 썼으며 ‘자기의 권리’도 신체와 재산 보호에 한정했을 뿐 정치적 참정권까지를 함축하는 의미로 확장하지는 않았다. 이런 사정은 개신 유학자들이 창간한 《황성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서양 학문의 수용이 절박함을 역설한 사설에서 “서인西人이 아국교사我國敎師로 고립雇立한 자者가 혹 십여 년이오 혹 칠팔 년이로되 상금尙今것 일개인一個人도 그 학문에 투철히 졸업하였다는 말은 득문得聞치 못하였노니.”라고 하여 ‘개인’을 숫자 개념으로 사용하였다.(1898년 9월 15일 자 사설) 지식인이 ‘근대적 개인’을 호명하게 된 것은 사회의 발견을 통해 상실된 국가를 되찾겠다는 방법론적 전회가 이뤄진 1905년 전후의 일이었다. 사회의 발견은 민력民力의 배양, 즉 개명開明을 통해 각성된 근대적 개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