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주의적 생산성과는 반대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나는 ‘절제’라는 말을 선택한다. 나는 그 말에 사람들 사이, 그리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교류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나아가 타인과 인공적 환경에 의해 강요된 수요에 대한 각자의 조건반사와는 반대되는 의미를 부여한다. 절제란 개인의 자유가 인간적 상호의존 속에 실현되는 것이고, 또 그러한 것으로서 고유한 윤리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사회에서도 절제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짐에 따라, 산업주의 생산양식이 아무리 증대되어도 그것이 사회구성원 사이에서 창조하는 필요를 유효하게 만족할 수 없게 된다고 믿는다.
현재의 제도가 갖는 목적은 절제의 유효성을 희생하여 산업주의의 생산성을 숭상하는 것으로, 이는 현대사회를 병들게 하는 개성상실과 의미상실의 중요한 요인이다. (…)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현재의 제도를 뒤집어엎어 산업주의적 도구를 절제적 제도로 대체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동시에 사회주의적 정의의 이상이 널리 퍼지지 않는 한 사회의 재정비란 공허한 꿈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여러 중요한 제도의 현재 위기는 혁명적 해방을 위한 위기로 환영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 제도들은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제도적 산출물을 공급하기 위해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를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규모의 제도가 갖는 세계규모의 위기는 도구의 성질에 대한 새로운 의식, 그리고 도구의 통제를 위한 대중행동을 초래할 수 있다. 만일 도구가 정치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면 도구는 재앙에 대해 뒤늦은 관료적 반응이라는 형태로 관리될 것이다. 자유와 존엄은 인간의 도구에 대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예속 속으로 계속 사라질 것이다.
기술적 재앙에 대한 대안으로 나는 절제의 사회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절제의 사회는 각 구성원에게 가장 충분하고 자유롭게 지역의 도구를 이용할 수 있게 보장하고, 이 자유를 오로지 다른 구성원의 자유만을 위해 제한하는 사회적 장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 『절제의 사회』, 박홍규 옮김, 생각의나무, 2010, 37~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