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정원은 공공장소다. 이 공간은 1930년대에 공공사업진흥국이 주도한 프로젝트였으며, 다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대공황 당시 연방정부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지었다. 나는 정원의 품위 있는 구조를 볼 때마다 그 시작을 떠올린다. 공익적 가치가 높은 이 장미 정원은 그 자체로 공익적인 프로그램의 결과로 탄생했다. 그러나 장미 정원이 위치한 이 지역이 1970년대에 콘도 부지로 변할 뻔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 나서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싹하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또한 이 지역이 콘도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 주민이 힘을 합쳐 대지의 용도를 변경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일은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업적으로 생산성이 없다고 간주되는 공간들은 언제나 위협받는다. 이러한 공간들이 ‘생산’하는 것은 측정하거나 활용할 수 없고, 심지어 파악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이 이 정원의 어마어마한 가치에 대해 말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요즘에는 우리의 시간을 두고 이와 유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적 개념이 우리 자신을 식민지로 삼는다. 누군가는 자신의 공원도 도서관이 늘 콘도로 바뀔 위협에 처해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는 저서 『미래 이후』에서 1980년대 노동운동의 패배를 ‘우리 모두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의 등장과 연결 짓는다. 그는 과거에는 경제적 위험이 자본가나 투자자의 몫이었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다르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모두가 자본가다. (…)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삶을 위험성 있는 경제 사업으로,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경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베라르디가 묘사하는 노동의 방식은 우버 드라이버와 콘텐츠 모더레이터플랫폼의 운영 취지에 부합하지 않거나 유해한 콘텐츠를 삭제하고 관리하는 사람-옮긴이. 가난한 프리랜서, 스타를 꿈꾸는 유튜버, 차를 몰고 일주일에 서너 곳을 돌아다니는 시간 강사 등 자신의 퍼스널브랜드를 신경 쓰는 모든 사람에게 익숙할 것이다.
국제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노동은 불안한 에너지들의 작은 꾸러미가 되어 거둬진 뒤 재결합된다. (…) 노동자들은 개인의 일관성을 모조리 빼앗겼다. 엄밀히 말하면 노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시간만이 존재하며, 그들의 시간은 상시 연결이 가능하고, 그 대가로 일시적인 급료를 받는다.
노동자에게 경제적 안정이 사라지자 여덟 시간의 노동, 여덟 시간의 휴식, 여덟 시간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경계가 무너졌고, 우리에게는 시간대나 수면 주기와 상관없이 현금화할 수 있는 24시간만이 남았다.
깨어있는 내내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여가 시간까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숫자로 수치화된다. 재고를 확인하듯 수시로 자신의 성과를 확인하고 퍼스널브랜드의 발전 과정을 감시할 때, 시간은 경제적 자원이 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에 쓰는 시간을 정당화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투자 대비 수익이 전혀 없다.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잔인한 교차점이다. 비영리 공간이 사라지듯이 우리도 자신의 모든 시간과 행동을 잠재적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다. 공공장소가 공공인 척하는 소매점이나 기업이 민영화한 수상한 공원에 자리를 내어주듯이 우리도 손상된 여가 개념을 주입받는다. 이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유료’ 여가다.
― 제니 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 김하연 옮김, 필로우2023, 53~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