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스트’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자신이 ‘국민’을 대표하여 오로지 자신만이 그럴 능력이 있다고 외치면서 국민과 경제·정치·문화 ‘엘리트’ 사이에 반목을 조장하는 정치인이 바로 포퓰리스트라고 말이다. 포퓰리스트들이 악당으로 묘사하는 ‘엘리트’란 국회, 법원, 자유 언론 등 합법적이고 관용적인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제도다. 흔히 극우 포퓰리스트는 문화적 차이와 국가 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포퓰리스트들은 흔히 이민자나 다른 민족이나 종교의 ‘습격’으로 마치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있는 듯이 묘사한다. 그러면서 우리를 결속시켜주는 제도와 규범을 존중하는 화합된 사회 그리고 관용과 이해와 공정성의 문화에 아주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다. 그들은 사회의 결속이 아닌 분열을 추구하고 자신의 목적에만 부합한다면 주저 없이 인종적·종교적·민족적 긴장을 부추긴다. 외로운 사람들, 불안하고 남을 신뢰하며 어딘가 소속되길 갈망하지만 항상 ‘뱀을 보는’ 이들은 포퓰리스트에게 이상적인 (그리고 가장 취약한) 목표물이다.(66~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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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단지 우리가 소셜 미디어에서 보내는 시간 때문에 주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덜 받아서만은 아니다. 소셜 미디어와 우리 사회 전체를 더 심술궂고 잔인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술궂고 잔인한 세계는 외로운 세계다.
온몸으로 총알을 맞으며 학대로 인한 고통과 그에 따르는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디지털 구경꾼들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우리 모두를 더욱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부모가 싸우는 모습, 더 심하게는 가정 폭력을 보고 자란 자녀가 내성적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성향을 키우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분노가 만연한 유해 환경에서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보내면 우리는 공격을 받는 당사자가 아니어도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혼자라는 기분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해한 행동을 많이 목격할수록 사회에 대한 신뢰가 전반적으로 감소한다. 앞서봤듯이 이에 따르는 사회적·정치적 파급효과는 크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수록, 우리는 더 이기적으로 굴고 더 분열되기 때문이다. (176~177쪽)
―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웅진지식하우스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