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류 역사상 이성애가 가장 인기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보수 기독교도들이 주장하듯이 성 소수자들이 동성애를 전염시키고 있어서는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든, 즐거움을 위해서든, 특히나 여성들에게 있어 이성애가 더 이상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대체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결국 섹스라는 행위가 없이는 자신의 성적 긴장을 해소하지 못하는 데 반해, 여성의 성욕은 더 다양한 방식의 행위들에 열려 있으며 유동적이다.
‘한남 패기’의 열풍에 맞서 미러링의 미러링을 시도하려던 몇몇 남성들이 “한국 여자와 섹스하지 말자!”라는 호기 어린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한국 남자들의 그 모든 주장 중에 이렇게 여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은 것은 없었다. 이 염치없는 존재들은 여전히 가정부, 요부, 애엄마, 며느라기가 되어줄 나만의 개념녀를 꿈꾼다. 그래서 폭력과 여러 사회적 제도들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상호 관계만으로 보면 상대방에게 목을 매고 있는 것은 한국 남자들이다. 흔히 노예와 주인의 역설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문제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남자의 비루하고 뻔한 섹슈얼리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미래다. 오늘날 한국 남자라는 정체성이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를 받는 분야가 단 하나라도 있는가? 한국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가 한국 남자이기 때문에 무언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는가? 단언컨대 자국의 관점에서도 글로벌의 관점에서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남자’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지만, 더 이상 해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남자이길 그만두기도 어렵다. 사회는 남자가 남자로 인식되는 한 그를 남자로 대접하고, 남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것이다. 남자로 인식되지 않는 남자는 ‘여자 같은 남자’, ‘변태’, ‘보빨러’, ‘고자’, ‘게이’, ‘트랜스젠더’로 재분류될 것이고, 그 기준은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일 것이다. 이성애 정상 가족을 기본 모델로 하는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유지되는 가운데에서는 남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도는 그 시스템과 지배를 해체하는 법에 대한 고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 사회가 제시하는 남자 그리고 여자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자세히 뜯어봐야 한다. 억압자이자 특권자로서의 자신을 경멸하고 자학하거나, 속죄의식의 일환으로 여성학 이론을 추종하는 것만으로(물론 이나마도 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것이지만) 이 고민을 끝낼 수는 없다. 사실 모든 지배 체제가 그렇듯이 이 문제에는 억압자뿐만 아니라 피억압자들 역시 연루되어 있다. 수많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 때로는 성 소수자들 역시 이 시스템과 지배를 유지하는 데 이용당하고, 참여한다. 그러므로 나 혼자 착한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불편함과 한계를 끌어안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기존의 성별 질서로부터 벗어난 성적 주체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진정한 남자, 진정한 여자, 진정한 성 소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의미를 상실하고 아무런 구분점이 되지 않는 상태를 향해야 한다. 이는 모두 천편일률적인 무성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각자의 성적 지향과 성적 실천을 존중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폭력이나 강제가 아닌 한에서는 재단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