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李珥가 강릉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서울로 왔을 만큼 신사임당은 혼인 후 거의 친정 근처에서 살았다. 아버지 신명화申命和가 신사임당을 특별히 아껴서 보내지 않았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당시 혼인 관행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 하여, 여자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신랑은 자신의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오가는 형태였다. 아버지 신명화가 서울 사람인데도, 혼인 후 서울과 강릉을 오가다가 끝내 강릉에서 살게 된 것도 당시 남자들이 처가 쪽에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유교적인 현모양처는 며느리라는 위치에 기반을 둔다. 즉, 시집살이를 전제로 한 ‘좋은 아내, 훌륭한 어머니’이다. 그런데 17세기 이전까지는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딸도 제사를 지내고 재산도 똑같이 상속받아서 여자들은 며느리보다 딸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한마디로 신사임당 때는 조선에 아직 유교적인 현모양처가 나올 토양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신사임당의 개인적인 성향 또한 현모양처와 거리가 멀었다.
어머님께서 평소에 항상 강릉을 그리워하여 밤중에 사람 기척이 없으면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고, 어떤 때는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 거문고를 뜯자, 그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시며 “거문고 소리가 그리움이 있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구나”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평소에 묵적이 뛰어났는데 일곱 살 때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했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 행장先妣行狀>
율곡이 어머니의 행장行狀에서 신사임당의 성격이나 재능을 묘사한 부분으로, 신사임당의 예민한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율곡의 눈에 어머니 신사임당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본인의 재능과 기호에 몰두한 사람으로 비쳤다. 반면 행장에서 교육 얘기가 단지 “자녀가 잘못이 있으면 훈계를 하였으며…”라는 딱 한 줄인 것으로 봐서, 교육 측면에서는 어머니를 기억할 만한 게 그렇게 강렬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 이런 신사임당이 유교적인 훌륭한 어머니로 만들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율곡의 학통을 이은 송시열宋時烈이 신사임당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면서였다. “오행의 정수를 얻고 원기의 융화를 모아… 마땅히 그가 율곡을 낳으실 만하다”라는 다분히 성리학적인 작품평을 하면서,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미술사 쪽에서는 신사임당의 그림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지만, 율곡의 어머니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화가로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도 한다. 이쯤 되면 신사임당은 율곡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현모양처가 된 느낌이 강하다.
신사임당은 38년간 강릉에 살았고 서울에서는 10년 정도 살았을 뿐이다. 즉, 며느리보다는 딸로서 훨씬 더 오래 살았다. 현모양처는 시댁에서 살면서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항상 강릉을 그리워하여 밤중에 사람 기척이 없으면 눈물을 흘리시며, 어떤 때는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는 신사임당은 딸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었다.
그리고 율곡은 어머니의 포도 그림이 뛰어나서 세상에 시늉을 낼 사람이 없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신사임당이 화가로서 일가를 이뤘다는 얘기다. 일가를 이루려면 자신의 능력에 집중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즉, 신사임당은 스스로에게 몰두한 사람이다.
이런 신사임당에게 남편과 자식에게 집중하는 현모양처의 모습을 바라기는 쉽지 않다. 물론 율곡은 훌륭하게 됐다. 하지만 그것은 신사임당이 ‘영재교육’에 발 벗고 나서서가 아니다. 사실 신사임당은 자식 교육에 그다지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일견하면 신사임당은 율곡에게 해준 것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저 풍부한 감수성을 물려주고 자신의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을 뿐이다. 율곡이 훌륭해지고 또 더할 수 없는 효자가 된 것은 율곡 스스로 노력해서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던 대로 신사임당을 그냥 현모양처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까? 익숙한 명제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현모양처를 포기하면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면 오늘날 우리는 신사임당을 더 매력적인 인물로 만날 수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에 유교적인 어머니의 교육열이 절대적인 기여를 한 것은 인정하지만, 21세기 창의적인 인간을 위해서는 그런 교육법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학 있다고 한다. 가능한 한 아이들을 자유롭게 사고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또 자신의 재능에 집중하여, 율곡이나 큰딸 매창梅窓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여유를 준 신사임당이야말로 21세기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어머니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