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2016년 봄 아동학대 사망사건들이 잇따를 때 온갖 매체에선 개탄과 해결 방안에 대한 논의가 넘쳐났다. 숱한 의견들을 읽고 쓰고 나누는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가장 불편했던 진단과 개선책은 ‘대가족과 공동체가 살아 있던 예전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는데, 핵가족화가 진전되고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아동학대가 늘어났다’는 류의 진단이었다.
이러한 진단들은 개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모두가 ‘엄마의 눈으로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반성들로도 이어졌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공동체가 살아 있던 과거엔 아동학대가 정말 적었을까? 아니면 은폐되고 묻혀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걸까? 이를테면 과거에 남아선호로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여자아이에 대한 영아살해는 가장 극단적 형태의 아동학대가 아닌가? 그런 관행을 덮어놓고 대가족과 공동체가 살아 있던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걸까?
나는 학대예방과 아동보호를 위해 더 많은 공공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지만 그 이유는 과거와 같은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공적 제도는 마을의 공동 책임이 아니라 아이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
기성세대는 다수의 사회 문제 해법으로 ‘마을 공동체’,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하는 반면, 젊은 세대는 공동체를 개인을 방해하는 답답한 개념으로 간주하고 거부한다.
2016년 여름, 이 차이로 인한 작은 논란이 SNS에서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 안희정 충남지사가 지역치안협의회 회의석상에서 범죄예방에 대한 대책으로 “마을공동체 회복으로 범죄를 예방하고 약자를 보호하자”라고 말했다가 트위터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트위터에서 자주 그렇듯 들끓고 곧 사라진 이슈지만 내가 이를 유심히 지켜본 이유는 젊은 세대의 공동체에 대한 반감이 예상보다 거셌기 때문이다. 의견 몇 개만 옮겨보자면 이렇다.
“마을공동체를 찬양하는 학자들은 그 이면에서 죽어가는 약자들은 보지 않는다.” “왜 굳이 끈적한 관계를 베이스로 한 공동체 이야기만 하는가.” “집집마다 수저가 몇 벌씩 있는지 알려고 아무 때나 문을 휙휙 열어젖히는 공동체 말고, 각자가 개인의 영역을 지키고 존중하는 한편 일개인에게 좌지우지되지 않는 튼튼한 시스템을 갖춘 문명사회를 원합니다” “나는 마을공동체 말고 각박한 개인주의 법치국가에서 살고 싶다.”
범죄 예방의 해법으로 공동체 회복을 제시하는 게 낡은 사고방식인 건 맞다. 폭력을 막는 건 공공서의 강화여야지 공동체적 관계의 회복이 그 방안은 아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강한 거부감의 이유가 단지 공동체와 공공성을 헷갈리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아마 각자 겪어본 공동체의 경험이 대체로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사건건 통제하고 간섭하며 구성원을 존중해주지도 않는, 수긍할 만한 원칙도 없고 권위를 가진 사람 마음대로인 폐쇄적 공동체들, 가족에서 학교, 회사에 이르기까지 겪은 부정적 경험이 공동체 일반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아닐까.
공동체의 억압적 측면을 주로 경험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된 개념이 아니라는 말은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하고 양자택일의 대상처럼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 생각엔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로 공공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서 한국 사회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가족주의가 공공해지고 더 나아가 사회의 연고주의로 확대되어온 과거를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공동체 내의 관계 유지와 갈등 해결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공공성’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다. 우리가 겪어본 공공성이라곤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보살피고 약자의 편에 서는 정의로운 힘이 아니라 강자의 뜻을 관철시키는 완력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