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마음을 읽다
고대의 합리주의자 사마천은 인간의 용모란 우연히 부여받은 것으로 인격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용모는 인간의 전기傳記에서 그렇게 중하지 않다. 그러므로 기록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한 주관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달리 표현하면, ‘저자를 읽으려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이야기는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간다.
이미 되풀이해서 말한 것처럼, 언어는 반드시 사실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전달하려는 사실이 있고서야 비로소 언어가 존재하고, 책이 존재하며, 저자가 존재한다. 독자가 저자를 건너뛰고, 저자가 전달하려는 사실에 우선 주의를 기울이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와 동시에 저자가 없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고대의 책들 대부분은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저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책은 다름 아닌 기원전 1세기에 나온 사마천의 『사기』다. 그 이전에 발생한 책은 『오경』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초사』, 모두 저자 혹은 필록자筆錄者의 이름을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일 뿐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형태로, 역시 저자는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책에는 반드시 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언어가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에 반드시 저자의 태도가 참여하고 작용함을 말해준다. 저자의 태도 또한 인간의 사실이다. 저자가 전달하려는 사실과 함께 인간의 커다란 사실인 것이다. 책을 읽으려면 그것에도 예민하게 주의해야 한다. 적어도 인간을 알기 위한 자료로 책을 읽으려면, 이 커다란 사실에 냉담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읽을 뿐만 아니라, 저자가 ‘전하려는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저자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양상, 특히 그 음성의 양상이다. 그것을 통해 저자의 태도, 바꾸어 말하면 ‘거기에 드러난 저자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저자가 전달하는 사실을 아는 것과 함께 인간을 연구하는 자료가 되어야 한다.
중국 학문의 전통, 또는 일본 학문의 전통은 이것에 매우 민감했다. 필시 서양 학문보다 이르게 민감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현재 그 전통은 쇠퇴했다. 나는 그 전통의 복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한 제국 창업자의 인상을 ‘우뚝한 콧날 혹은 툭 불거진 광대뼈, 용과 같은 이마, 왼발에는 72개의 사마귀’라고 기록, 전달하려 한 것 자체는 반드시 중요한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애초에 사마천이 기록한 한 고조의 인상이 역사적 사실로 존재했었는지 의문이다. 사마천은 고조보다 백 년 뒤에 살았던 인물이니, 옛 기록이나 전문傳聞을 근거로 기술한 데 지나지 않는다. 혹은 당시에도 초상화는 상당히 발달했었다. 고조의 세 공신 가운데 한 명인 장량의 전기 『유후세가留侯世家』 권말에 있는 논찬論贊(부론附論)에서 사마천은 말했다. “장량은 고조가 ‘계책籌策을 군막帷帳 안에서 운용하여, 승리를 천 리 바깥에서 결정짓는 데는 내가 자방만 못하다’고 상찬한 인물이다. 외모도 체구가 우람하고 기이하며 눈부시게 늠름하리라 예상했던바, 그 초상화를 보니 모습狀貌이 여인네처럼 고왔다婦人好女.”
유후 장량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으니, 당연히 고조 유방의 초상화도 존재했다. 그리고 유방의 초상화는 사마천이 품었을 예상에 어울리게, ‘융준(졸)이용안, 미수염’인 형태로 그려져 있었을 것이고, 사마천은 그것도 기록의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왼발에 72개의 사마귀가 있었다’는 초상화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오로지 전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본래부터 이 건은 그것에 가까운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아주 가까운 측근이 아닌 한 혹은 색을 즐겼다는 이 영웅과 잠자리를 같이 한 여성이 아닌 한, 알 도리가 없는 사실이다. 물론 패의 풍읍 중양리의 실력자에서 벼락출세한 오만한 영웅은 종종 알몸으로 신료들을 인견引見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요컨대 고조라는 인물이 ‘융준(졸)이용안’이고, ‘미수염’이며, ‘좌고유칠십이흑자’였는지, 역사적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다. 또한 고대의 합리주의자였던 사마천이 ‘좌고유칠십이자’라는 기묘한 전승을 그대로 믿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런데 사마천 자신도 확신하지 못할 사실을 「고조본기」 편을 시작하는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삼았다는 것 자체에 이미 저자의 태도가 있다. 또한 이 경우 그 태도는 의식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식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마천은 「십이본기十二本紀」 「삼십세가三十世家」 「칠십열전七十列傳」을 통해 수백 명의 인물 전기를 지었는데, 이렇게 인물의 육체적 조건을 언급하는 일은 그렇게 잦지 않아, 여기에서는 평소의 태도를 깨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것에 관해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던 저자가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인간의 육체, 적어도 용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는 않다. 유후 장량의 용모가 ‘부인호녀’와 닮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앞서 언급했다. 진시황에 대해서는, 책사 위료尉繚가 처음 알현했을 때 “진왕의 인물 됨됨이는 벌처럼 우뚝한 콧날, 길게 찢어진 눈, 굳센 가슴, 승냥이 같은 목소리, 은혜가 적고 범과 이리처럼 마음이 사나운秦王爲人, 蜂准, 張目, 摯鳥膺, 豺聲, 少恩而虎狼心” 무서운 분, 이라고 평한 것을 「진시황본기」에 한 에피소드로 기록했고 또한 전국 시대의 관상가 당거唐擧가 책사 채택蔡澤에 대해 “선생의 코는 전갈처럼 납작하고 어깨는 우뚝하게 높으니先生曷鼻巨肩” 운운한 것이 「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에 보이는 것, 모두 13고에서 언급한 대로다.
또한 「항우본기(고조와 천하를 두고 다투다 패한 항우의 전기를 제왕과 나란히 취급한 편)」에서는 끄트머리 논찬에서, 실의에 찬 영웅의 눈은 ‘중동자重瞳子’였다는 전설을 언급한다. ‘중동자’가 무슨 뜻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여튼 평범한 눈동자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옛 성왕聖王 순舜도 ‘중동자’였다고 하는데 항우는 그 후예일지 모르고, 그가 급격히 세력을 키운 것도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면이 없지 않은데, 이것은 주생周生이라는 사람에게 전해 들었다고 씀으로써 책임을 주생에게 돌리면서 권말의 부론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진시황의 벌 같은 콧날蜂准이나 채택의 전갈 같은 코曷鼻 운운은 모두 권 안에 하나의 에피소드로 언급했고, 항우의 중동重瞳은 권말의 논찬에서 다룬 부론이다. 「고조본기」의 언급처럼 권의 첫머리에 가까운 단락은 아니다.
용모에 대해 이렇게 냉담한 형태로만 언급한 것은, 고대의 합리주의자 사마천이 인간의 용모란 우연히 부여받은 것이며 인격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보다 앞선 시대의 철학자 순자가 「비상非相」, 즉 관상학의 어리석음을 다룬 논문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태도를 취했으리라 생각한다. 즉 용모는 인간의 전기傳記에서 그렇게 크고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가볍게 보아 기록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한 주관이 있지 않았을까. 다만 여성의 경우는 다를지도 모른다. ‘이색사인以色事人’, 용모의 아름다움으로 사내에게 봉사한다. 그것이 당시 일반적인 여성관이었다. 주周 왕조의 관제官制를 기록한 『주례周禮』가 궁중여성의 교양으로 든 네 가지도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공婦功’, 또 하나는 ‘부용婦容’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의 경우 후궁들의 전기 「외척세가」에서도 후비의 용모에 대한 언급은 없다.
어쩌면 합리주의자 사마천은 인간의 용모를 취급하는 것에 또 다른 반발심리가 있었을 수도 있다. 군주, 특히 고대의 성왕은 모두 용모가 특별하고 범상치 않았다는 설에 대한 반발이다.
─ 요시카와 고지로, 『독서의 학』, 조영렬 옮김, 글항아리, 2014, 214~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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