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자네가 이 기나긴 모험을 시작한 건 결국 악이라는 문제 때문이었지. 자네를 재촉한 건 바로 악의 문제였어. 지금까지 긴 얘기를 들었지만 그 해답을 찾았다는 얘긴 없었던 것 같군.”
“애초에 해답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제가 모자라서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라마크리슈나는 이 세상을 신의 장난으로 보았어요. ‘그것은 유희와도 같으며, 그 유희에는 기쁨과 슬픔, 미덕과 악덕, 지식과 무지, 선과 악이 존재한다. 삼라만상에서 죄와 고통이 모두 제거되면 그 유희는 끝을 맞는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생각을 거부하고 싶습니다. 제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절대자가 이 세상에 그 자신을 현현했을 때 선과 악이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예요. 지각변동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없었다면 히말라야 산맥의 장관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의 장인들은 얇은 도자기로 예쁜 모양의 꽃병을 만들어 거기에 아름다운 디자인을 넣고 멋지게 색칠한 다음, 완벽한 광택을 추가하죠.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도 그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쉽게 깨질 수밖에 없어요. 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독창적인 생각이군, 래리. 하지만 썩 납득이 가진 않는데.”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이 정도겠죠.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라.”
“앞으로는 무얼 할 생각인가?”
“여기서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뭐하러?”
“살러요.”
― 서머싯 몸, 『면도날』, 안진환 옮김, 민음사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