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지내는 건 이유 없이 그러는 게 아니야, 하고 쥘리앵은 생각했다. 베리에르에서 나는 터무니없는 자만심에 부풀어 있었지.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건 단지 준비일 뿐이었어. 이제야 나는 세상에 나온 거야. 진짜 적들에게 포위된 채로, 내가 맡은 역할을 죽을 때까지 연기해야 하는 세상에 말이야. 매 순간 이렇게 위선을 부리기란 엄청난 고역이야, 하고 그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헤라클레스의 고역이 무색해질 정도지. 그러고 보면 현대의 헤라클레스는 식스투스 5세라고 할 수 있어. 그는 재기 발랄하고 거만하던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았던 추기경 마흔 명을 15년간이나 겸손을 부려서 속여 넘겼잖아.
이곳에서 학식이란 아무 가치도 없어! 쥘리앵은 분통을 터뜨리며 생각을 계속 이어 나갔다. 교리나 종교사 등에서의 학업 성과란 겉으로만 중요시될 뿐이야. 성적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전부 나처럼 멍청한 녀석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이지. 맙소사! 내가 가진 유일한 장점이란 학업을 빠르게 익히고, 그 시시한 공부 내용을 잘 이해한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저들은 그저 외워 대기나 할 뿐, 그 내용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평가해 보려 하지 않지. 저들은 나와는 달리 판단하려 하지 않는 거야. 그런데 멍청하게도 나는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으니!
─ 스탕달, 《적과 흑》, 열린책들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