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기 전까지의 내 삶은 전형적인 한국 직장인의 ‘저녁 없는’ 삶으로, 매일 야근이나 철야, 접대로 집에서는 밥 한 끼 지어 먹지 않는 날이 많았다. 저녁이나 주말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프로답지 못하다 생각하고, 겨울 내내 아이가 아프다며 병원에 들렀다 늦게 출근하는 워킹맘에게 의심을 눈초리를 보냈다. 평범한 아이도 한 달 동안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아이를 기관에 보내보고 나서야 알았다. 돌이켜보면 당시 나의 무지함과 옹졸함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 시절 나와 함께 회사 생활을 한 워킹맘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린다.
아무튼 이런 선천적, 후천적 한계를 딛고 단 몇 달 만에 엄마 역할에 적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아이를 죽이지 않고 돌보는 법을 겨우 익힐까 했더니, 직장 복귀 시점이 되었다. 고령에 출산을 하다 보니 직장에서의 책임도 만만치가 않아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2년 동안 두 분의 시터 이모님 도움을 받고, 두 돌이 지나 아이가 기관에 가고 또 2년이 지나 지금까지 주변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사이 나와 관계를 맺었던 많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피해를 감수해야 했음을 잘 알고 있다. 회사, 아이, 그 밖의 모두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화가 나고, 그냥 누군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머리가 조아려지던 시절이었다.
7년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지금은 다른 엄마들 발가락 따라갈 정도의 육아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육아능력시험’이 있다면 낙제점 간신히 면할 수준이다. 부족하지만 아이와 내가 그럭저럭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하다.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돌봄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살고 있겠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임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나는 아이를 기르면서, 어떤 글을 썼을 때 보다, 어떤 기획을 했을 때 보다, 어떤 봉사를 했을 때 보다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아가 육아의 와중에 얻게 되는 인간에 대한 다양한 통찰이 사회생활, 조직 생활을 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생각에 충분히 동의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돌봄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중요성에 대해 간증한다.
― 김희진, 『돌봄 인문학 수업』, 위즈덤하우스2019, 1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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