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소세키는 메이지시대 일본 근대문학을 개척한 대표적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원래 유교적 한문교양을 익히면서 성장한, 말하자면 구시대인이었죠.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국비장학생으로 런던 유학까지 다녀온 이후에 잠시 교편을 잡다가 그만두고는 창작을 업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그는 일본이 근대화를 향해 질주하던 당시 지식인의 복잡한 심리상황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교양 있고 자의식이 강한 인간에게는 근대화의 이름으로 정신없이 서양 따라잡기에 바쁘던 그 시대상황이 무척 고통스러운 것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 자신도 꽤 성공한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심사가 편치 않아 위궤양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그가 남긴 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우리더러 자기를 잊고 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본위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근대적) 논리에 강박적으로 붙들려있다. 그 결과, 우리의 인생은 하루하루가 초열지옥焦熱地獄이다.” 예리한 지적이죠?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원자화된 개인’의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를 갈수록 강화한다는 것, 그리하여 공동체 ― 사회적, 자연적 공동체 ― 를 전제로 한 모든 ‘인간관계’를 체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결국은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담이지만, 지옥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과연 뭘까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으로, 브렌던 캐널리라는 아일랜드 사람이 있는데 지금도 생존해 있습니다. 이 시인이 쓴 시에 “지옥이란 경이로움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든지, 환한 햇살 속에 익어가는 옥수수밭을 보면서도 경이의 감정이 솟아오르지 않는 게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인은 그런 경이의 감정이 사라진 상태, 즉 ‘지옥’이란 다른 말로 하면 권력욕망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이로움이 죽을 때, 권력욕망이 태어난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이 세상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저 시인에 따르면, 인간이 권력을 탐하고 남을 지배하려거나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은 그의 정신과 영혼이 병들었거나 메말라버린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간은 사람 간의 관계우정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혹은 햇빛과 바람과 구름의 은혜로 익어가는 곡식을 보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자연의 운행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인지 모르는 ‘지옥’에서 산다는 것이죠. 참으로 탁월한 성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김종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녹색평론사2019, 123~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