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의 문제점 중 하나는 과잉 서열화다. 평가를 통해 인재를 선별하는 건 교육의 기능에 해당하지만 우리는 성적이 전부인 것처럼 매 순간 줄을 세운다. 경쟁은 치열하고 또 너무 빈번해서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 공부 못하는 애들은 학교가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누구를 예뻐하는지 귀신같이 안다. 성적으로 우위가 나뉘는 사회에서 관심 밖에 밀려난 아이들이 어떻게 수업과 학교에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그래서 애들은 자기들만의 규칙을 만든다. 학교가 아이들을 ‘성적’으로 평가한다면 아이들은 힘과 돈, 인기를 기준으로 들고 나온다.
소년들에게는 특히 힘과 돈이 우선시된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남성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년들 사이에서 ‘게이’남성 동성애자는 가장 모욕적인 욕 중 하나다. 가부장 사회에서 선망되는 남성성이 부족한 남성, 남자답지 않은 남자는 그들 사회에서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힘을 과시하고, 돈을 갈구하며, 여성을 대상화한다.
소년들의 범죄 유형을 보면 소녀들과 다르게 재산 범죄가 압도적으로 많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절도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불법 토토나 사채 놀이도 기승을 부린다.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은 달콤하다. 한탕주의에 빠진 소년들은 “어차피 다른 수단으로는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으니” 혹시 모를 가능성에 인생을 건다. 이러한 아이들의 얼굴은 빛을 내 주식과 가상화폐에 뛰어드는 어른들을 닮아 있다.(154쪽)
*
소녀들의 세계에서는 무엇보다도 ‘관계’가 중요했다. 소녀들과의 인터뷰에서는 소년보다 관계 지향적인 면모가 두드러졌다. 감정 분석 결과에서도 이 경향성이 드러났다. 소녀들이 가장 부정적으로 느끼는 단어는 ‘싸우다’였고, 긍정적으로 느끼는 단어는 ‘친하다’였다. 소년들에게 최상위 부정어가 ‘때리다’인 것과 대비된다.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성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게 아닐까. 그러나 모든 소녀가 성공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건 아니다.
(중략)
우리가 만난 소녀들 중 상당수는 친밀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방법을 몰라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뒤틀린 관계가 비행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소녀 범죄자 중에는 학교폭력 피해를 계기로 학교에 나가지 않고 가출을 일삼다가 범죄의 세계로 들어선 경우가 적지 않았다.
(중략)
눈에 띄는 건 소녀들에게는 이성보다 동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는 아빠보다 엄마와의 관계에 영향을 받았고, 학교에선 애인이나 남자 선후배가 아닌 동성 친구와의 관계에 더 큰 비중을 뒀다. 특히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도피처로서의 친구 관계가 두드러졌다. 친구에게 기대는 건 엄마에게 받지 못한 애정과 친밀감을 채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었다. 학교 선생님은 이미 관계가 틀어진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연락소통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이성 친구는 피상적인 관계에 그쳤다. 남자 친구 혹은 남자 선배를 지칭하는 ‘오빠’란 단어에는 친밀감 외에 ‘무섭다’는 감정도 섞여 있었다. 소녀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건 또래 소녀뿐이었다.
이러한 심리 때문에 소녀들은 친밀감에서 비롯된 범죄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인터뷰에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비행을 저질렀다”라고 털어놓은 소녀들이 여럿 있었다. 특수 폭행 혐의로 소년 보호시설에 온 열여덟 살 서율은 “내 뒷담화를 하고 다닌 애한테 따지고 싶다. 대신 싸워달라”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162~164쪽)
*
열여섯 살 다솔에게 엄마는 애증의 존재였다. 다솔은 엄마의 외도와 재혼으로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낯선 도시로의 이사, 열악해진 경제적 여건, 새로운 학교와 친구들은 십 대 소녀가 감당하기 버거웠다. 다솔은 힘들어진 자신의 상황을 모두 엄마 탓으로 돌렸고,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을 골라서 했다. 엄마와 새아빠 얼굴을 보기 싫어서 집 밖을 떠돌며 가출팸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때로는 물건을 훔치고 사기도 쳤다. 다솔은 “엄마만 아니었으면 행복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엉망으로 살았다. 그냥 놀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고백했다.
한국 사회에서 모성애가 얼마나 신화화되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완벽한 엄마’라는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엄마의 모습에 아이들은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자녀 양육에 있어 엄마의 역할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그러한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다.
이 기억은 소녀들의 삶에서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동시에 소녀들은 엄마와의 완전한 단절 대신 관계 회복을 소망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이들의 마음속엔 “연락이 잘 되지 않는 엄마가 밉지만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애증과 “엄마가 나한테 편지를 써줬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이 공존하고 있었다.(165쪽)
― 이근아·김정화·진선민, 『우리가 만난 아이들 - 소년, 사회, 죄에 대한 아홉 가지 이야기』, 위즈덤하우스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