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손은 자주 철학적 담론의 대상이 되어왔다. 사르트르 역시 『존재와 무』에서 움켜잡고 잡히는 손에 대해 썼다. 그는 묻는다.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내 몸 안에 있는 것은 조종사가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은가? 사르트르는 자신의 손으로 데카르트에 답한다.
나는 몸으로 ‘존재’한다. 나는 펜으로 글을 쓸 때처럼 내 손을 사용해 쓸 수 있지만, 펜을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과 달리 손은 떼어낼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사르트르에게 피아노에 관해 물어볼 수 있다. 손은 피아노처럼 악기의 한 종류인가, 아니면 현을 때리는 해머인가? 손은 음악을 읽고 해석하는 의식에 지배당하는가, 아니면 피아니스트가 곧 그의 손인가? 그렇다. 피아니스트는 그의 손이다. 손에 피아니스트의 존재 전체가 담겨 있다. 손은 분명히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에 관여한다.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손으로 물체를 만짐으로써 우리는 물체와 관계 맺는다. 악수가 끈적이는 이유는 축축한 손 때문이 아니라 손이 세계의 점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기름 낀 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름 낀 손은 고체도 액체도 아닌, 어떤 중간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지 주머니 안에서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것을 느낄 바에는 차라리 손바닥에 칼을 꽂고 말 이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피아노 건반을 만질 것인가? 건반을 만지는 따듯한 손이 건반 위에 반짝이는 땀방울을 남겨두는가? 아니면 신체의 온기로부터 분리된 손이 차갑게 굳어 있는가? 사르트르의 손가락은 건반을 쓰다듬을 뿐 꿰뚫지 않는다. 상아색 건반은 수직으로 움직이지만 손은 수평으로 운동한다. 미세한 움직임으로 기계를 작동시키듯, 손은 건반 위에 섬세하게 자리 잡는다. 사르트르의 터치는 세련됨과 서투름 사이를 오간다. 땅딸막하고 투박한 손가락이지만 우아하게 움직인다. 피아노는 해머가 현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다.
어떤 연주를 들을 때 피아노 안에 들어 있는 해머의 존재가 느껴진다면 그 연주는 대체로 나쁘다고 평가한다. 사르트르의 손은 건반을 때리지도 내려찍지도 않는다. 그의 터치는 부드러운 순백색 건반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 있다. 사르트르는 건반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건반을 유혹하겠다는 듯이…….(3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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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성향이 강했던 사르트르는 환각과 꿈의 통제 불가능성을 싫어했다. 꿈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있다. 꿈은 꿈을 꾼 사람 자신도 모르게 기억을 조작하고 재배열한다. 이는 꿈이 원작자에게 충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어떤 상징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유동성 때문이다. 아도르노처럼 꿈을 소재로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꿈은 그에게 철학적 글쓰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중요한 소재였다. 사르트르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꿈의 내용보다는 꿈꾸는 활동 자체였다. 이야기나 이미지만으로는 꿈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 꿈은 이미지 없는 상상이고, 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드러나지 않은 비밀, 움직임에 대한 탐구 그리고 희미한 말들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서로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피아노를 칠 때 사르트르는 상상계를 분주히 작동시켜 지나간 감정과 재구성해낸 꿈의 조각들을 불러 모은다. 이러한 음악 연주는 놀이의 면모뿐 아니라 연극적인 측면도 있다. 사르트르는 마치 자신이 연극 무대에 선 것처럼 스스로를 음악 작품에 투사했다. 배역을 나눠주는 것은 악보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에게는 쇼팽 역이 주어졌다. 음악과 하나로 연결되기 위해 프레이즈에 자신을 내맡겼다. 음악을 연주하는 시간만큼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정치적 현실과 유리된다. 미래를 위한 계획이나 의지는 잊은 채, 오직 아련한 과거를 되찾고 묘한 영원성이 공기 중을 떠다니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영원성은 직선으로 펼쳐진 음표들이 마디를 넘어갈 때마다 물결처럼 너울거린다. 사르트르의 음악적 상상력은 아도르노의 꿈처럼 노스탤지어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음악을 이론과 창작에 도움이 되는 활동으로 생각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가와 달리 사르트르는 음악을 오직 과거에 대한 향수와 연결시키는 것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지식인이었다. 그중에는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비판함으로써 가족이라는 신화를 타파하려 했던 일도 포함된다. 가족 구성원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이용되는 공감의 이데올로기가 사르트르가 보기에는 비합리적이고 근거가 부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피아노는 반사적으로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와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각별한 유대감을 느끼는 사이였다. 그런 측면에서 바르트는 본받을 만하다. 바르트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가족주의가족 구성원 개인보다 집안이 우선시 돼야 하는 이데올로기 없는 가족을 주장했다. 어머니를 가족의 일원이 아닌 한 명의 여성으로 생각함으로써 모자간에 나눈 진실된 사랑이 어머니라는 상징성 때문에 퇴색되지 않도록 했다. 사르트르는 건반 위에서 어머니와 함께했던 지난 날들에 대한 따스한 암시를 그의 글 곳곳에 조금씩 남겨놓았다. 어머니와 주고받은 사랑이 평가절하되는 것에 대비했던 것이다.(40~42쪽)